●유복문서 옛날 시흥 땅에 있었던 이야기다. 정생(鄭生)이란 사람이 시흥 땅의 이 진사(進士)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되어 신부집에서 초례(醮禮)를 지낸 뒤 미처 신방도 차리기 전에 신랑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급보를 받고, 그 자리에서 황황히 본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정생의 아버지는 진사로서 전실 소생의 외아들인 정생과 후취인 양씨를 거느리고 많은 세전(世傳)의 재산을 지켜가며, 50평생을 안락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아들 정생을 시흥 땅으로 장가보내 놓고는 그 당일로 무슨 급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부친의 장례를 모실 묏자리를 걱정하던 중 마침 처갓집 뒤에 있는 처갓집 소유의 산에 마땅한 자리가 있다 하여 상주(喪主)인 신랑은 지관(地官)을 데리고 그 묏자리를 보러 갔다가 다시 한번 산 밑에 있는 처갓집엘 들렀다. 처갓집은 장인 되는 이진사가 별세한 지 오래되어 외동딸을 데리고 사는 처지였다.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묏자리를 빌리러 왔다는 이야기를 하여 장모에게 승낙을 받고자 함이었다. 하여튼 초례만 지내고 신랑차례도 못한 채 돌아간 신랑이 뜻밖에 다시 오고 보니 비록 상제가 되긴 했지만 여간 반갑지 않았다. "상사(喪事)를 당하여 얼마나 애통한가" 하고 사위에게 인사를 한 다음 딸을 불러 한 방에 앉게 하였다. 장모는 상주에게 위로도 할 겸 술상을 차려와서 딸보고 따르도록 하였다. 장모는 둘만의 시간을 내어주기 위해서 슬쩍 피해주고, 정생은 아무리 초상 상제라지만, 백년의 짝이 될 색시를 처음 대하고 보니, 마음이 풀리고 술을 마셔 거나하게 취하게 되어 새댁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아리따운 신부의 자태가 정생으로 하여금 황홀하게 만들고 철석간장인들 녹지 않을 수 없었으며, 눈동자가 흐려지더니 신부의 손을 잡고 허리를 껴안았다. 잠시 동안 침묵 이 흘렀다. 정생은 주섬주섬 옷 매무새를 다시 갖춘 다음, "에잇! 그만 가봐야겠다." 며 한 마디 남긴 채, 일어서서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며칠 후에 장례식날이 되어 정생은 다시 처갓집 뒷산에 그 아버지를 산에 모시러 왔다. 그런데 신부가 산판에 나타나더니 정생의 옷깃을 당기면서 이 무슨 해괴한 말을 하는 것인가. 당신이 내 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는 것을 문서로서 써달라는 것이다. 정생은 이 어처구니없는 말에 그만 어언이 벙벙했다. 아무리 무지몽매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럴 수는 없었다. 많은 회장(會葬)꾼이 보고 있는 가운데 신부는 부끄러움도 없는 듯 보였다. "무엇을 써내란 말이냐" 고 상주는 이맛살을 찌푸리 고 있는데 새댁은, "당신이 친산(親山) 일로 처갓집엘 왔다가 대낮에 새댁과 상면을 했는데 그때 새댁과 정을 통하고 달아났었다는 말을 써내란 말이오." 하여, 신랑은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계속 망신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까닭은 후일에 두고 보면 알 일이라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깊은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다. 정생은 체념한 듯이 빨리 써주는 것이 망신을 덜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마침내 그대로 써주고 나니, 이 꼴을 보고 있던 여러 사람들은 혹 웃기도 하고, 혹 의구하게 생각하면서 쑥덕거리곤 하였다. 마침내 많은 수치심을 지닌 채 상주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은 신부집에선 의당 상 가의 애통이 가시기를 기다려 새로운 신방을 꾸미고 신행길을 차려야 했다. 그러나 어인 일인지 장례를 지내고 돌아간 지 불과 7일만에 상주, 즉 신랑이 이름 모를 병으로 또 죽고 말았다. 신부는 이러한 변고(變故)가 올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저 침통할 뿐이었다. 그 후 장례가 끝나면서 정씨댁으로 들어가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시댁에서는 혼인을 지내다가 중지한 채 홀로 된, 더군다나 장례식날의 일로 보아 미친 새댁을 데려갈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거절을 당한 이씨는 결코 미친 여인이 아니었다. 이씨는 지긋이 자기의 깊은 짐작과 예견으로 남편의 명복을 빌기에 골몰했다. 그러다가 이듬해 봄에 유복자(遺腹子)를 낳으니, 바로 이때부터 이씨의 선견지명(先見之明)은 나타났던 것이다. 만일에 유복문서를 받아두지 않았더라면, 지금 태어난 이 아이가 정생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할 도리가 없고, 더군다나 멀쩡한 아들에게 불의의 사생아라는 누명을 씌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신랑이 며칠 안 가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미리 알게 된 것에는 까닭이 있었다. 신랑이 처음 온 처갓집에서 상주의 몸으로 대낮에 참지 못하고 그런 것을 한다는 것으로써 중정(中情)이 허한 사람이나 며칠 못 갈 사람으로 알았으며, 며칠 전에 급사한 아버지의 여화(餘禍)가 미치지나 않을까 염려해서였다. 그 후 1년이 흘렀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계모가 그 집 살림꾼인 홍서방과 눈이 맞아 그 많은 재산을 가지고 야밤 도주하듯이 어디론지 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혈통이라고는 이 유복자뿐인데, 종적을 감췄다는 데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름을 정유복(鄭遺腹)이라 짓고, 온갖 공력을 어린아이 양육에 집중할 뿐이었다. 유복이가 무럭무럭 자라나 다섯 살이 넘었다. 아이도 예삿아이는 아니었지만 훌륭하게 키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머니는 부지런히 일했다. 아침이면 서당에 가서 그날 배울 것을 받아가지고 와서, 전날에도 안 하던 일이었지만,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면서, 유복이를 함께 데리고 나가 틈틈이 그 어머니는 글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유복이를 어디에 떼어놓고 가기가 싫어서였다. 한편, 집안이 쓸쓸하다는 이유로 각지를 돌아다니는 방물장수들이 동네에 들어와서 잘 곳을 찾을 때는 모두 자기 집으로 보내달라고 하여 공손히 밥을 대접하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뜻 없이 방물장수를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시댁 계모 양씨의 행방을 탐지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양씨의 흉악한 부탁을 받고 유복이를 해치려고 비밀리 들어오는 자객을 미리 알아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 뒤 7, 8년이 흘렀다. 이씨가 방물장수 식주인 노릇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접촉했는데, 어떤 날 방물장수 이야기 속에서 마침내 놀라운 일이 발견되었다. 충청도 예산 땅에 노루지라는 동네에 홍진사(洪進士)와 양씨 부인이 사는데, 천석군 부자이면서도 더 부자가 되겠다고 소작인들에게 인심을 잃고 있다는 것이며, 양씨부인은 교만한데다 지나가는 사람 밥 한 끼 안 주는 노랭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집은 서울 말씨를 하고 있다며 그 부잣집과 가깝게 지내고 신임을 받아 재미를 보는 이가 바로 자기 집에도 와서 자고 간 비단장수 할머니란 것을 알아냈다. 그 이가 자객임이 틀림없었다. 그 이유로서는 살림꾼이었던 홍서방은 그 전부터 양씨와 정을 통해왔으며, 정진사 부자가 죽을 때도 약도 안 써서 죽게 한 것이었다. 이제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유복자인 정씨네 상속자가 언젠가는 장성한 뒤에 유산을 상속해 갈 것이니 아주 없애버리겠다는 흉계가 있음직한 것이었다.
비단장수 할머니가 한 날 이씨 집에 그전과 다름없이 찾아왔으나, 이씨는 이미 양씨가 보낸 자객임을 짐작했었고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맞아들였다. 그 할머니는 유복문서만 빼내 갈 수만 있다면 상당한 보수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이씨의 친절함과 유복이가 정진사댁 혈손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고, 오히려 양씨의 양심이 미워지기도 했다. 이씨가 할머니에게 그 내용을 다 아는 것처럼 쏘았다. 그러자 그 노파는 사실을 모두 고백하면서 오히려 양씨의 죄상에 대하여 증인이 돼줄 것을 말하니, 10년간을 은인자중하면서 때를 기다려 오던 이씨의 목적은 이제와서 완전히 성취할 수 있었다. 마침내 이씨는 노파를 앞장세워 충청 감영을 찾아가 양씨와 홍부자의 간음. 살인. 재산횡령 등의 죄상을 적발, 고소하며 재판을 했다. 그때 그처럼 세상에 이야깃거리이던 유복문서(遺復文書) 한 장이 이때의 재판에 더없는 증거물이 되어서 정진사 집의 굉장한 재산은 다시 정유복의 앞으로 상속되었다. 정유복은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은 공부로 뒷날 어진 선비가 되어 집의(執義)란 벼슬에 이르고, 그 재산은 소작인들과 빈민들을 위해 후히 한 결과 많은 사람들의 송덕(頌德)이 자자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