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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근대

고대

정왕동의 오이도에서 조개무지가, 목감동 흥안산과 정왕동에서 빗살무늬토기조각이 발견되어, 이미 신석기 시대에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믿어진다. 군자산 서쪽 구릉지대에서 민무늬토기 후기에 속하는 검은 간토기조각들이 출토되었으며 목감동에는 고인돌이 남아 있어 해안을 중심으로 청동기시대에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시흥시의 전신인 소래읍ㆍ수암면ㆍ군자면 지역은 본래 백제의 영토였으나 삼국이 서로 한강유역을 차지하려 할 때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여 잉벌노현(지금의 시흥시의 광명시), 율목군(지금의 안양시와 과천시)을 설치하였고 장수왕 63년(475)에 수암면ㆍ군자면은 장항구현(獐項口縣), 소래읍은 매소홀현(買召忽縣)이라 했다.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을 점령하자 신라 제24대 진흥왕 14년(553)에 신라의 영토가 된 후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 각각 곡양현, 율진군, 장항구현은 장구군(獐口郡)으로 매소홀현은 소성현(邵城縣)으로 개칭되었다.

고려

고려시대의 장구군은 태조 23년(940)에 곡양현은 금주로, 율진군은 과주로, 장구군은 안산현(安山縣)으로 각각 바뀌었다. 금주는 《고려사》《대동지지》에 의하면 성종때 시흥이라고도 하였는데 지금의 시흥이라는 명칭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성종 14년(995) 단련사를 설치하였으나 목종 8년(1005) 폐지하였고 현종 9년(1018) 안남도호부(지금의 부평)에 붙였으며 명종 2년(1172)에 처음으로 감무를 두었다.

과주는 성종 때 부안 또는 부림이라고도 하였으며 1018년 광주목에 속하였으나 뒤에 감무를 두었다. 충열왕 10년(1284) 이곳에 용산처를 부원현으로 승격시켰다. 안산현은 1018년 수주(수원)에 속하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가, 1038년 문종이 탄생한 고을이라 하여 지군사로 승격되어 안산군이 되었다.

소성현은 모후(母后)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출신지라 하여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인종 때에 이르러 모후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출신지라 하여 인주(仁州)로 되었다가 공양왕 2년(1390)에 경원부(慶源府)로 승격되었다.

조선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를 개혁할 때 금주는 금천현으로 과주는 과천현으로 개칭되어 안산군과 함께 모두 경기도에 속하였다. 1414년 금천현과 과천현을 합하여 금과연이라고 하였다가 몇 달 뒤 파하였고, 금천현과 양천현을 합하여 금양현으로 하였다가 1416년 다시 나우어 금천으로 괴고 현감을 두었다.

안산군은 세조 9년(1463)에 강희맹(姜希孟) 선생이 중국 남경의 전당지(錢塘池)에서 연꽃씨(蓮子)를 가지고 귀국, 하중동 208번지에 소재한 관곡지(官谷池)에 심은 후 널리 퍼져 세조 12년(1466)부터 별호(別號)를 ‘연성(蓮城)’이라 하였다.

1456년 금천현이 과천현에 병합되었으나 얼마뒤 복구되었다가 1795년(정조 19)에 시흥현이 되었다. 안산군은 1467년 강희맹에 의하여 연성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1793년 수원부에 잠시 이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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