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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양명학의 일인자 정제두(鄭齊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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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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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양명학의 일인자 정제두(鄭齊斗)
○생몰년도: 1649~1736
○조선 후기의 유학자. 양명학자. 자는 사앙(士仰). 본관은 영일(迎日). 호는 하곡(霞谷),
○가족관계: 정몽주의 11세손으로 진사(進士) 정상징(鄭常徵)의 아들,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
○시호: 문강(文康).
○출생 및 거주: 한성부 반곡방(盤谷坊)에서 출생하였으나 시흥시 화정동 가래울 마을에서 살았다.
○ 2017년 11월 15일 시흥시 화정동 735번지 가래울마을 큰 우물가에 '추곡 정제두 선생 유허비'를 세웠다.

○생애  

어려서는 이상익(李商翼)에게 수학하다가 20여세 때부터 박세채를 스승으로 섬기며 수학 하였다. 선생의 집안은 당대의 손꼽히는 명문이었지만 청년기의 가정생활은 다복하지 못했 다. 5세 때 아버지를 잃었고, 16세 때에는 할아버지를 잃었다. 그리고 23세 때에는 부인(파 평 윤씨)마저 그 해에 낳은 아들(원일 : 原一)을 남겨 놓은 채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26 세 때 남영 서씨와 재혼하기에 이르렀다.  

   젊은 시절의 선생은 건강도 좋지 않았다. 선생의 건강상태는 관직에 나갈수 없음은 물론 30대의 젊은 나이 임에도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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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on_arrow03.gif 강화군 하일리에 있는 선생의 옛집터
     (1970년대) 

하직하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였다. 일찍이 20세 때 별시 (別試)ㆍ초시(初試)에 응하여 합격한 뒤 24세 때 동생(정제태 : 鄭齊泰)와의 공동 응거(應 擧)의 불미로움을 이유로 재차의 초시 합격에서 중단하고 두문불출하였다. 32세때에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이 천거하여 사포서별제(司圃署別堤)에 임명되었으나 질병으로 취임하지 않았 따. 2년 뒤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지만 질병이 더 하여 취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병약 으로 동생(정제태)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스승인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에게 마지막 유서 를 해당하는 편지를 써 보낼 정도였다.


  선생은 40대 후반에서 50대 말까지 여러 차례 관직을 받았으나 모두 거절한 채 오직 학 문에만 정진하였다. 즉 최석정(崔錫鼎)의 서연(書筵) 추천(48세)를 비롯하여 경기도사ㆍ세자 익위사 익찬(50세), 삭녕군수(52세), 사도시 주부(54세), 종부시 주부(57세), 사헌부 장령(58 세), 사복시 정(58세), 사헌분 집의 등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60대에도 선생의 생활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주어진 벼슬이 좀 높아진 것이 변화라 면 변화였다. 61세에 장손이 두창(瘡)으로 타계하자 큰 충격을 받고 가래울에서 선조의 묘 가 있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현 인천광역시 가오하군 양도면 하일리)로 이사하였다. 곧 통정대부에 오르고 61세에 호조참의, 62세에 강원도관찰사, 63세에 회양도호부사에 제수되 었으나 도호부사의 직에만 2개월간 부임하고 모두 나가지 않았다.

 필적(소장처 : 성균관대 박물관)
  70대부터 선생은 종전의 모습과 전혀 다른 '노익장'의 건재함을 보여주었다. 높은 관직이 자주 주어진데다가 부임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던 것이다. 71세에 가선대부로 승계, 76, 79세 에 성균관 좨주, 79세에 세자시강원 찬선, 80세에 자헌대부로 승계, 80세에 의정부 우참찬, 86세에 의정부 우찬성, 87세에 원자보양관, 88세에 세자이사, 88세에 승록대부로의 전계등 을 받았다. 선생은 어느 경우나 일단 사직소를 냈지만 거의 불허되었다. 뿐만 아니라 왕에 의 입대(入對) 입시(入侍)를 함으로써 이런 것들이 부임과 다름없는 선생의 실질적인 관직이 되었다.

  만년의 선생의 노익장은 특히 학문세계에서 그 빛을 발했다. 선생이 60대 이후 보인 저술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즉 63세에 『심경집의(心經集義)』, 66세에 『정문유훈(程門遺訓)』 ㆍ『정성서주(定性書註)』, 70세에 『단의빈복제의(端懿嬪服制議)』, 72세에『중용설(中庸 說)』, 73세에『경학집요(經學集要)』, 82세에『천원설(天元說)』, 83세에 『진강책자문(進講 冊子問)』 등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청년기에는 허약하여 34세에 유언ㆍ유서를 남 길 정도로 병약하던 선생이 놀랍게도 88세까지 장수하는 기적적인 생애를 보내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선생은 처음에는 주자학을 공부하였으나 일찍부터 양명학에 심취하였다. 양명학(陽明學)은 명나라의 왕수인(王守仁, 호는 양명)에 의해 주창된 유학의 한 계통이다. 양명학은 주자학에 대한 부정의 시각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자학을 관학(즉 통치원리)으로 채택하고 있던 조선조에서는 이것이 크게 발달하기는 원천적으로 어려웠다. 실제로 주자학을 능가할 정도 로 발달하지 못하였던 것이 조선조 양명학의 실상이다.

  중종 16년(1521) 무렵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양명학은 그 전래 초부터 박상(朴祥)에 의해 비판적 시각으로 이해되었고 특히 조선조의 대표적 주자학자인 이황(李滉)에 의해 양명학을 적극 비판, 배척받았다. 그러나 양명학은 남언경(南彦經)과 이요(李瑤) 등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했고, 허균(許均)과 이수광(李?光)ㆍ최명길(崔鳴吉)ㆍ장유(張維) 등에 의해 부분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특히 장유는 당시 조선의 유학계가 중국에 비해 지나치게 주자학 일변 도로 편향, 옹색하여졌음을 한탄하면서 조선 유학의 발달을 위해서는 양명학의 연구가 필요 함을 역설하고 스스로 양명학을 연구했다.

  그 결과 장유는 양명학에의 전향을 어느 정도 이룩하였고, 마침내 선생에 의해 우리 나라 의 양명학파가 독자적으로 형성되었다. 당시의 학자가 주자학을 한다는 사실은 그것으로써 영달하는데 이용하고 파당을 짓는데 이용하였다. 선생은 『존언(存言)』에서 "오늘날에 와 서 주희를 부회(附會)하는 것으로 자기 생각을 성취하는데 주희를 끼고 위엄을 짓고 그 사 계(私計)를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주자학자들의 학문이 학문하는 것이 아 니라 영달과 공리로 흐르는 데 반성을 촉구한다. 뿐만 아니라 주희를 끼고 권위를 짓는 행 위가 마치 천자를 끼고 제후에게 호령하는 것처럼 남을 복종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황을 반대하였다. 그것은 당시의 노론과 소론 등 파당싸움을 배경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양명학에 호의적이었고 어느 정도 그것을 연구한 학자들 대부분이 자신과 가 문의 안전을 위하여 스스로 양명학작가 아니라 주자학자임을 표방하기에 급급했다.

  당시는 주자학에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사문난적(斯文亂賊, 유교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 으로 몰려 목숨까지 빼앗기던 시대였다.

선생은 타고난 재질이 학자로 대성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던 듯하지만, 당시 학식있는 양반 이면 다 하게 되는 관계에의 진출을, 특히 젊은 날에는 선생의 건강의 열악함 때문에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관계진출을 포기한 선생이 학문에만 전심하게 된 동기나 용기도 오히려 건강의 악조건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생사를 가름하기 어려운 조건에서는 속된 명리뿐만 아니라 속된 제약 역시 무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선생은 청년기(23세 무 렵)부터 80여 세의 노령에 이르기까지 남들이 금기시하던 양명학에 조예를 깊이 하여 조선 조 양명학자로서 '일인자'의 위치에까지 올랐다. 선생의 아들 정후일(鄭厚一)ㆍ윤순(尹淳)ㆍ이광사(李匡師) 형제, 김택수(金澤秀)등이 선생의 문인으로서 학풍을 이었다.
저술: 『학변(學辨)』ㆍ『존언(存言)』 이외에도 『중용설』ㆍ『대학설』ㆍ『논어설』 ㆍ『맹자설』ㆍ『삼경차록(三京箚錄)』ㆍ『경학집록』ㆍ『하락역상(河洛易象)』 등 경전주석 과 『심경집의』ㆍ『정성서해(定性書解)』ㆍ『통서해(通書解)』 등의 송(宋)대의 도학자 저술에 대한 주석도 하였다.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도로변.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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