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정승 윤지완(尹趾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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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34본문
● 청백리 정승 윤지완(尹趾完)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숙린(叔麟), 호는 동산(東山),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가족관계: 이조판서 윤 강(尹絳)의 아들이며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의 아우.
선생은 2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28세에 증광시 을과에 4등으로 급제하여 39세에 설서에 제수된 뒤, 헌납ㆍ부수찬 등을 지냈다. 선생이 41세 되던 해(1675) 지평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여 경연에 나가 당쟁의 폐단 을 통박하고 덕원으로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의 신구(伸救, 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씻음) 를 건의했다가 당시 집권당인 남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선생의 인장 |
선생이 60세가 되던 해(1694) 폐비 민 씨 복귀운동과 관련된 갑술옥사를 계기로 민씨의 복위를 지지한 소론이 등용함에 따라 유배 에서 풀려나 복직되어 좌참찬ㆍ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인 안산 동 산으로 내려갔다가 70세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83세에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 해 좌의 정 이이명과 독대를 했고, 세자(世子, 경종)에게 청정(聽政)의 어명이 있자 80 노구로 관 (棺)을 가지고 서울에 돌아와 이이명의 옥대(玉帶,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가 공복(公服)에 띤 띠)를 통박하고 세자 청정이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극언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이이명을 가리키며 "대신은 국왕의 사신(私臣)이 아니다"라고 통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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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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