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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편지 남긴 어진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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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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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편지 남긴 어진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생몰년도: 1618~1674
○조선시대의 왕비. 성은 장(張), 본관은 덕수(德水).
○가족관계: 아버지는 우의정 장유(張維)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 소생은 1남 5녀로 현종과 숙안(淑 安)ㆍ숙명(淑明)ㆍ숙휘(淑徽)ㆍ숙정(淑靜)ㆍ숙경(淑敬) 등 공주이다.
○출생 및 거주: 시흥시 장곡동 산68 안골마을(현 장곡동 매꼴마을 동양 덱스빌 아파트)에서 출생.
○시호: 인선(仁宣: 사랑의 베풀고 의로운 일에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어진 소문이 두루 난 것을 '선(宣)'이라 함). 또 경렬명헌(敬烈明獻)이란 휘호를 더 올렸다.

○생애 

왕후는 태어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얌전하여 함부로 장난치며 놀지 않았다. 6세가 되자 할 머니인 박씨부인(판윤 박승원의 딸)이 데려다 기렀다. 일찍이 할머니를 따라 수원부사로 있 던 작은 아버지(장신)의 관아에 갔다가 가끔 남몰래 부모 생각이 나 눈물을 짓곤 하였다. 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물으면 대뜸 눈물을 씻고 다른 일이라고 대답하여 걱정을 끼치지 않 게 하므로 할머니가 기특히 여기고 더욱 사랑하였다. 왕후의 형(*오빠인 장선징을 지칭?)이 얼굴에 부스럼이 나 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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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n_arrow03.gif 인선왕후가 태어난 안골마을(1995)

어떤 사람이 어린애 똥이 가장 효험이 있다고 말하자 어머니가 일부러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왕후의 뜻을 떠 보았다. 이에 왕후가 즉시 손수 발라주면서 싫어하는 기색이 없자 아버지가 매우 기뻐하며 기특히 여겼다.

  

13세 되던 해(1630) 인조가 봉림대군의 배우자를 친히 간택을 했는데, 왕후의 행동거지 와 응대하는 것이 예사스럽지 않을 것을 보고 매우 현숙하게 여겨 드디어 선발이 되었다. 이듬해 가례(嘉禮)를 올리고 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봉해졌다. 대궐에 들어온 후에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여 어김없이 효도와 공경을 하자 인조의 비인 인렬왕후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4년이 지나자 대궐에서 나와 사저에서 살았는데 가정 일을 조리 있 게 잘 처리할 뿐만 아니라 집안 일도 크든 작든 혼자 결정하지 않았다. 19세(1636)에 병자 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20세 때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에 쳐들어오자 궁중이 발칵 뒤집혀 너나없이 울부짖으며 당황하였으나 왕후는 차분한 모습으로 말이나 행동이 평 상시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므로 모두들 감탄해마지 않았다.


  병조호란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瀋陽)에 인질로 갈 때 따라가 8년간이나 온갖 험난을 다 겪으며 뒷바라지를 하였다. 28세 때(1645) 소현세자가 죽자 봉립대군이 세자가 되므로 곧 세자빈이 되었으나 책봉을 제 때 받지 못하고 사저에서 왕자를 낳았다. 그 뒤 책 봉되어 32세 때(1649)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고, 2년 뒤 정식으로 책명을 받았다.

   중전이 되자 내직(內職)을 처리하고 빈어(嬪御)들을 따뜻하게 하여 친목하게 하고 엄히 하 면서도 은혜를 베풀었다. 또 항상 공경하고 근신하면서 몸을 유순하게 가졌다. 항상 말하기 를 "부인이 스스로 잘난 체 하면 가정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암닭이 새벽에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항상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42세(1659)에 이르러 효종의 병이 위중하자 왕후가 하늘에 빌며 자신을 대신 데러가 달라고 호소하였다. 급기야 승하하자 예에 지나치도록 곡을 하며 슬퍼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보내는 일에 대해 시신을 씻기고 손톱과 발톱을 자르는 것부터 비록 하찮은 일이라도 반드 시 몸소 하며 정성을 다하였다. 그 뒤 졸곡[卒哭, 사람이 죽은 지 석달만에 오는 첫 정일(丁 日)이나 해일(亥日)에 지냄] 때까지 미음만 들었다. 이에 현종이 울면서 음식을 들도록 청하 자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다는 것이 사실은 과한 일이지만 살기 위하여 억기로 밥을 먹 으면서까지 살려고 하는 것은 내 차마 못하겠다."하였다.


  45세 때(1662)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아 왕대비(王大妃)로 있다가 효종의 승하 후 몸을 돌보지 않은 것이 병이 되어 그것이 고질(痼疾,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운 병)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여러 번 호서(湖西)의 온양에 자주 거동하여 온천에서 목욕하여 다소의 효험이 있었 으나 병이 갑자기 심해져 57세 되던 해(1674) 2월 24일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였다. 이 때 왕후의 시어머니인 인조비(仁祖妃) 조대비(趙大妃)가 어떤 복(服)을 입느냐 하는 예송 (禮訟)이 일어나, 기년복(朞年服), 대공복(大功服)을 둘러싸고 송시열(宋時烈)과 윤휴의 대립 이 크게 일어났다.


  왕후의 70건의 한글편지가 남아 있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일반생활의 안부이지만, 무 대가 궁중과 사대부가의 사연이므로 궁중풍속, 정치사건 등도 포함되어 있다. 또 한글편지 뿐만 아니라 국문학관계, 특히 중국소설 언해(諺解)를 다독한 흔적이 있어 중국소설의 언해 시기, 독자상황, 부녀자와 국문소설과의 관계에 있어서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며, 그녀의 필 적을 통해서 한글 서체(書體)를 감안할 때 효빈체(效嚬體)에서 궁체(宮體)로 넘어가는 과정 에 속하는 것이나 궁체에 가까운 위치에 있어, 조선 중기 여인들의 언간(諺簡)과 더불어 황 후의 언간의 학문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위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 능호는 영릉(寧陵)으로 사적 제 195 호로 지정.

 - 1999년 5월 21일에 시흥문화원에 의해 왕후가 태어나 살았던 장곡동 매 꼴마을에 '조선시대 인선왕후가 살던 마을 유래비'(글 : 한국정신 문화연구원 교수 장철수) 가 제막되었다. 또한 왕후가 좁쌀을 찧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싶다고 말했다 는 돌절구는 현재 시흥문화원에서 보관, 관리하고 있다.

 인선왕후의 한글편지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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