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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생활 실천한 이 시대의 교육자 김옥길(金玉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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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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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생활 실천한 이 시대의 교육자 김옥길(金玉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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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n_arrow03.gif 서은당 툇마루에서(1980년 대 말)

 

○생몰년도: 1921~1990
○교육자. 본관은 풍천(豊川).
○가족관계: 원남면장 김병두(金炳斗)와 어머니 방신근(方信根) 사이의 장녀. 사학자 겸 국회의원 김동길(金東吉) 의 누나, 전 이화여대 음대 도서실 주임 김옥영(金玉映)의 언니.
○출생 및 거주: 평남 맹산군 원남면 향평리 110-1에서 출생.

○생애 

선생이 8세 되던 해 봄 보통학교에 입학하자 너무 기뻐서 새벽이면 몰래 학교에 갔다 문 이 잠겨 다시 돌아오곤 하였다. 보통학교를 마칠 무렵 아버지가 경영하던 광산이 기우는 바 람에 온 식구가 평양으로 이사 나왔을 때 가정형편이 어렵게 되어 진학을 포기하고 삯바느 질하는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하며 어린 동생들을 보살폈다. 그래서 남보다 2년이나 늦게야 숭의여자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 후 서문고등여학교를 마치고 20세에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여 기숙사에서 일을 하며 학비를 보탰고, 23세에 졸업하던 해(1943) 사감에 발탁되어 6년간 근무했다. 사감시절 선생은 무척 엄격하고 무서운 인상을 주었다. 신입생이 오면 원서의 사진, 이름, 가족사항 등을 따로 외워두었다가 부모님과 짐을 들고 들어오는 학생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무개 너는 몇 호실로 가' 하는 바람에 학생이나 부모 모두 놀라곤 하였다.
29세부터 32세까지 3년간 김활란(金活蘭)의 모교이기도 한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 교에서 기독교문학을 전공하고 부산 전시 캠퍼스에서 첫 강의를 시작했다. 그뒤 37세에 미 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한 후 이듬해 귀국하여 기독교학과 과장, 학무과장, 학무처 차장 등 이화여대의 중요보직을 두루 맡으며 학사행정의 실무를 익혔다. 당시만 해도 '김옥길 선생' 하면 검정 두루마기에 두손을 푹 찌르고 캠퍼스 구석구석을 누비며 학생을 감독하는 무서운 선생, 마음속까지 꿰뚫어보는 듯하는 유난히 검은 눈망울의 주인공, 대강당 채플 때 "2층 다 5열 ○○과 아무개 조용히 해"하며 야단치는 교수, 혹 마이크가 꺼져도 쩌렁쩌렁한 육성으로 주의사항을 전달할 수 있는 분 정도로 학생들은 기억할 뿐이었다.
41세에 김활란 총장의 강권으로 학위를 위해 미국 유학을 준비하던 중 5ㆍ16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군사정부의 임시특례법에 의해 김활란 총장이 갑자기 물러나게 되어, 이해 10 월 1일 한국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이화여자대학교 제8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총장직을 맡게 되지 유학계획은 취소되고 총장으로 취임하는 날 이화여대에서 명예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41세의 젊은 총장은 패기와 열정으로 학교일을 해나갔다.
총장임기 6년을 세 번, 18년 이라는 세월 동안 이화여대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위임 당시인 41세에 이화여대의 학생은 8천명, 대학원 하나, 단과대학 일곱 개, 학과 서른 한 개가 있었으나, 50세에 퇴임할 때 에는 대학원 두 개, 단과대학 열 개, 학과 쉰 개, 학생수 1만 명이었다. 선생은 외적인 팽창 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 더 힘썼다. 학문하는 대학을 지향하여 각종 연구소 열네 개가 개설 되었고, 1971년에는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국제하기대학을 설립하여 외국인 학생, 해외 동포 자녀들을 교육케 하였다.

  1979년 세 번째 임기가 끝날 무렵 총장직을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누가 이화에 대해 말하면 내가 더 잘 아는 것 같이 생각되니 오만해지고 한계를 느낀다"는 말을 남기고 총장 직을 후배에게 물려주었다. 그 후 7년간 단 한 번도 교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새 총장이 소신껏 일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해 12월 15일부터 이듬해 5월 20일까지 최규하(崔圭夏) 대통령 내각의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다. '국보위(國保委)'가 무소불위(無所不 爲)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짧은 재임기간동안 학원자율화, 학생과 교수의 복학 및 복직, 학도호국단개선 등 한때나마 교육계에 새바람을 일으켜 자율장관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문교부장 관직을 물러난 뒤 소란스러운 서울을 떠나 문경새재 신성봉(神仙峰)기슭(충북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 고사리마을)의 금란서원에서 옥수수와 조를 가꾸며 살 때에도 선생의 식탁에는 늘 수많은 제자와 친지들이 모여들었다. 선생은 다정한 문경새재의 장관 할머니, 총장 할머니로 바람과 산과 나무와 바위의 친구로 살기 시작한 이후로 선생을 찾는 이들에 게 자연에서 배운 지혜를 즐겨 들려주었다. "나뭇가지가 새로 돋으면 묵은 가지는 어느 사 이에 사라져버리더라." 자연에 관련된 그의 어록(語錄)은 항상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의미를 함축했다. 10년간을 이곳에서 산 선생은 동생 김동길이 자신의 인세(印稅)로 마련해준 고사 리마을 8만여 평의 땅을 '이화학당에 무상기증한다'는 증여서를 남겼다.
  1986년 가을 김영의 이사장이 타계하자, 이 해 12월 학교법인 이화학당 이사장과 이화발 전후원회 회장에 취임하였고, 이어 1987년에는 재단법인 우월 김활란장학회 이사장에 피선 되었다. 66세 때(1986) 직장암이 발병되어 그 후 두 차례의 대수술을 받으면서 암과 투병했다. 1990년 4월 5일(음력 3월 10일) 이대 교정에서 있은 고희연(古稀宴)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생일상이었다. 70평생을 살아오면서 주위에서 숱하게 권한 생일잔치를 한번도 허락 하지 않았던 선생이 여러 번 사경을 헤맨 끝에 맞은 이날 생일은 '영이별'을 걱정하던 제자 와 친지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다. '오래 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제자들의 마음이 담긴' 거북 모양의 금반지를 선물로 받자 선생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된다 해도 그것은 의술이나 정성의 부족함 때문은 아닐 것"이라고 인사말을 했다. 동생 김동길은 누님의 칠순 생일선물로 이화여대 목동병원 신축기금 1억원을 내놓았다. 남매의 우애는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만년까지 동생은 커피를 끓이고 빵을 굽고 과일을 깎아 누님이 들 수 있도록 해주면 서 세상 얘기를 했다.

  선생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과 정(情)과 신뢰를 나누어 와 자신의 일생 은 결코 외롭거나 후회되지 않는다고 말년에 측근들에게 전했다. 선생은 회고록쓰기를 권하 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잘못한 것은 빼고 잘한 것만 생각나 가치 있는 회고록이 될 것 같 지 않다"며 사양했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평생 역설해 온 좌우명은 "책임과 질서와 약속을 지켜라. 한번 약속한 것은 불리하더라도 지켜라. 사실에 근거한 말은 용기를 갖고 해라"였 다.

  1940년부터 50년간 '이화'와 깊은 인연을 맺은 선생은 그 밖에도 많은 기관ㆍ단체 등에 서 사회봉사활동을 했다. 1948년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시작으로, 국제연합한국위원 회 위원장(1963), 한국크리스챤아카데미 이사(1965~1979), 가정법률상담소 이사 (1966~1979), 성곡학술문화재단 이사(1969~1979),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유지재단 이사 (1969~1979), 흥한재단 이사(1970~1988), 다락방전도협회회장(1970~1980), 기독교방송 이사(1970~1980), 백인협의회 회장(1970~1979), 한국어린이재단 이사(1972~1983), 군복 음화후원회 부회장(1972~1975), 한미협회부회장(1973~1983), 운정장학재단 이사 (1974~1979), 산학협동재단 이사(1974~1982), 대한여학사협회 회장(1975~1979), 삼성미 술문화재단 이사(1976~1979),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이사(1977~1979), 민족문화추 진화 이사(1978~1979), 연강학술재단 이사(1979~1980), 이대명예총장(1979~1990), 이수 화학공업주식회사 이사(1979~1990), 대한적십자사 중앙위원(1988~1990)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에 「예수의 생애와 교훈(역서)」, 「열린대문과 냉면 한 그릇」(1994), 「내 잔이 넘 치나이다」(1994) 등이 있다. 상훈으로 국민훈장 모란장(1970), 마리아 클라타상(비율빈, 1976), 인촌문화상(1982), 유니온 신학대학원 공로상(미국 뉴욕, 1983),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0), 적심자인도상 금장(1990) 등을 받았다.   1990년 8월 25일 오전 2시 55분, 김동길ㆍ김옥영ㆍ김수옥(秀玉, 주부) 등 동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한 선생은 "나의 죽음으로 주위 사람들을 번거롭지 않게 간소하게 장례식을 치러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70세를 일기로 서울 자택에서 타계했다. 장례는 정의숙(鄭義淑) 전 이대총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김옥길선생 이화여대 학교장 위원회'가 구성되어, 이 해 8월 27일 선생의 부모 유택이 있는 시흥시 광석동 산 311-4에 안장 되었다.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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