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영상을 접합시킨 개척자 이서구(李瑞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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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24본문
●역사와 영상을 접합시킨 개척자 이서구(李瑞求)
| ○생몰년도: 1899~1981 ○극작가ㆍ연출가ㆍ언론인. 호는 고범(孤帆). 본관은 한산(韓山). ○출생 및 거주: 서울시 중구에서 출생. ○가족관계: 후릉참봉 이관규(李冠珪)의 장남, 어머니는 조성녀(趙姓女). 슬하에 2남 4 녀를 두었다. ○생애 사립훈도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교동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제일고등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한 뒤 사립 오성학교에 편입하였으며, 이어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했다. 22세 때(1920) 동아일보 창간 사회부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후 이듬해 조선일보 동경특파원ㆍ매일신문 사회부장에 이르기까지 신문기자로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조선 일보 동경특파원 시절에는 일본대 예술과에 수학하면서 25세가 되던 해(1923)에는 박승희 (朴勝喜)ㆍ김기진(金基鎭) 등 동경 유학생들과 함께 신극연극단체 토월회(土月會)를 창립하 여 우리나라 신극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
그 뒤 34세에 동양영화사 지배인을 거쳐 37세에 시에론 페코드회사 문예부장, 40세에 경 성방송국(JODK) 연예주임, 45세에 동양극장 전문 취체역을 지냈다. 그 후 조선연극문화협회 초대 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 전 반세기 연극계의 대들보로서 큰 활약을 하였다. 광복 이듬해(1946)에는 한국극작가 동우회장과 문예신보 주간을 지냈고, 49세에 서울시 공보처장, 51세에 한국무대예술원 원장을 지냈다. 1950년에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공보처 전 시선전대책위원회 사무국장, 이듬해 종군 극작가 단장, 54세에 국방부 승리일보 주간을 거 치면서 국민의 국난극복을 고취시키고 국군의 사기를 드높이는 일에 전념하였다. 또한 7사 단 평양탈환 작젼에 종군하여 평양입성 직후에 평양문총(平壤文總)을 결성하여 평양의 문화 예술인들의 권익신장에 앞장섰다. |
한국전쟁 후에는 방송계에서 활동을 많이 했는데, 61세에 한국방송극작가협회장과 한국무 대예술원 최고위원이 되었고 63세에 한국방송문화협회장을 지냈다. 선생은 1950년대 이후 에는 방송극 쪽으로 방향을 돌려서 『햇빛 쏟아지는 벌판』 등 수많은 라디오 드라마를 썼 고, 1960년대부터 텔레비전 방송국이 본격 등장한 뒤로는 주로 텔레비전 연속극을 발표했다. 선생의 작품은 대중의 비극적 정서에 호소한 신파 희곡 |
이 많으며, 특히 사극(史劇)에 능했 다. 방송극의 경우에도 조선 왕조의 야사를 극화한 『장희빈』ㆍ『강화도령』과 같은 역사 극을 많이 집필하여 역사와 영상을 접합시킨 최초의 실험자요 개척자로서 한국방송에 도표(道標)를 세웠다. 선생은 동양극장 시절 임선규(林仙圭) 등과 함께 이 땅에 신파극을 대중극으로 토착화하 는 데 기여한 대중극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선생이 작사한 대중가요의 노랫말에는 「홍도야 우지마라」가 있다. 1930년대 말엽에 김영춘이 불러 대 힛트한 이 노래는 우리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강점기에 고달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던 대표적인 대중가요로 오늘날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불리우는 명작이다. 상훈으로는 서울시문화상을 비롯하여 공보부 방송문화상, 화랑무공훈장, 국민훈장동백장, 3등문화훈장을 받았다. 향년 83세에 서울시 역촌동 산 25-6에서 사망했다. |
○작 품
시 | 「산나물 가자」(1933)ㆍ「아버지」(1934)ㆍ「가을거뒤」(1941)ㆍ「푸른하늘」(1941) 등 |
소설 | 「누흔」(1923)ㆍ「회한」(1927)ㆍ「눈물에 젖는 사람들」 (1927)ㆍ「사랑의 디옥」(1928)ㆍ「박연행」(1928)ㆍ「롬펜대장 출세담」(1934)ㆍ「거인 구락부」(1935)ㆍ「유선형부부도」(1935)ㆍ「구쓰와 영애와 여급」(1935)ㆍ「결혼태평기」 (1936)ㆍ「공포광시대」(1936)ㆍ「행복의 운하」(1936)ㆍ「마음의 달」(1936) |
희곡 | 「동백꽃」(1931)ㆍ「청빈」(1938)ㆍ「만 월」(1944)ㆍ「곡선영감」(1944) |
수필 | 「빈촌야화」(1926)ㆍ「병든 청춘」(1927)ㆍ「신문기자를 내놓으면 무엇을 할 까?」 (1927)ㆍ「홍수중의 보도기자의 샘」(1927)ㆍ「스틱」(1928)ㆍ「다섯가지 승락을 받고야」(1928)ㆍ「괴상한 남학생과 좋은 동요」(1929)ㆍ「국립 국민제조장을 설치」(1929) ㆍ「경성의 째즈」(1929)ㆍ「대경성 암흑가 종군기」(1932)ㆍ「여배우의 정조와 사랑」 (1932)ㆍ「가면신사와 가면숙녀」(1932)ㆍ「찌그러진 남비」(1934)ㆍ「이십팔만풍」 (1934)ㆍ「우리집의 봄빛」(1934)ㆍ「종로야화」(1934)ㆍ「아낙의 비밀」(1934)ㆍ「차디 찬 심경」(1936)ㆍ「백의춘희애가」(1936)ㆍ「애인 데리고 갈 사랑의 하이킹코스」(1936) ㆍ「대경성 식구경」(1936)ㆍ「미희와 백골」(1936)ㆍ「무모생활」(1940)ㆍ「기자시절」 (1958)ㆍ「염문ㆍ기행ㆍ만화」(1958)ㆍ「무용담-나의 기자시절」(1958)ㆍ「사상기생이야 기」(1958)등 |
평론 | 「조선극단의 금석」(1931)ㆍ「조선의 유행가」(1932) |
저서 | 「풍류의 뒷골목」ㆍ「세시기」등 |
○묘 및 묘비
문학비 : 홍도야 우지마라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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