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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체의식 드높인 실학자 류득공(柳得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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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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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주체의식 드높인 실학자 류득공(柳得恭)○생몰년도 : 1748~1807○조선 후기의 실학자ㆍ문인. 자는 혜보(惠甫)ㆍ혜풍(惠風)이고, 호는 영재(?齋)ㆍ영암(?庵) ㆍ고운당(古芸堂)이며, 본관은 문화(文化).○가족관계 : 문양부원군 류자신의 8세손으로 아버지는 류 춘(柳瑃).○출생 및 거주: 군자동 산뒤마을에서 출생.
○생애 
영조조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시문에 뛰어난 재질이 인정되어 정조 3년(1779)에 규장작검서(奎章閣檢書)로 들어가 활약이 컸다. 그 뒤 제천ㆍ포천ㆍ양근 등의 군수를 거쳐 말년에 풍천부사를 지냈다. 선생은 박지원(朴趾源)의 제자로서 이덕무(李德懋)ㆍ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과 중국의 문물 수입을 적극 주장하였고, 당대의 사검서(四檢書) 혹은 한학4가(漢學四家)의 한 사람으 로 불리었다.정조에게 발탁되어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벼슬에 나가기 이전에 선생은 고향 산뒤 마을에 서 상처받은 한 마리 새의 아픔을 자신의 처지로 의인화시켜 이처럼 아름다운 시를 남겼다. 시기적으로 보아 20세 전후한 시로 보인다. 상처받은 새를 향하여 연민의 정을 보내는 또 다른 한 마리 새는 마치 같은 서족출신으로 선생과 평생 우정과 뜻을 같이했던 글벗(文友) 박제가(朴齊家)를 그리고 있는 듯하다.
  선생의 묘는 의정부시 낙양동 산 120에 있다.   
○주요 저서

『경도잡지(京都雜志)』, 『발해고(渤海考)』, 『사군지(四郡志)』, 『영 재집(?齋集)』,『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앙엽기(?葉記)』 등.



『경도잡지』

우리나라 민속학 연구에 귀중한 문헌으로 기 록이 드문 조선시대의 풍속과 세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이 책은 같은 세시기(歲時記)인 『열양세시기』ㆍ『동국세시기』보다 먼저 집필되었다. 모두 2권 1책인 이 책은 제1권에서는 문물제도를 주로 기술하였는데, 그 내용은 주로 사대부의 생활문화에 국한되어 있고, 일반 백성의 생활상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제2권은 당시의 세시를 서술하되 해박하게 많은 문헌을 인용하여 고증하고, 연원과 유래까지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발해고』

 과거 고려에서 체계적인 발해사 서술이 이루어지지 않은 데 대한 저자 자신 의 강력한 비판위에서 쓰여졌다. 선생은 『신당서(新唐書)』 등 17종의 중국서적과 『삼국 사기』 등 한국사서, 『속일본기』 등 모두 22종을 참고하여 이 책을 썼다. 종래 발해에 대 하여는 『삼국사기』ㆍ『동국통감』ㆍ『동사강목』 등에서 단편적으로 서술되어 오다가 허 목(許穆)의 『기언(記言)』과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이종휘(李種徽)의 『동사(東史)』 에서 독립된 항으로 서술된 적이 있었으나 서술의 분량이 보잘 것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 사의 범주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선생이 처음으로 서술의 분량과 성격에 있어서 발해사를 본격적으로 한국사화(韓國史化)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그 뒤 한치윤ㆍ홍 석주ㆍ정약용ㆍ김정호 등에게 그러한 성격이 일정하게 전수되었다. 선생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분명히 밝혀 우리 민족사의 범주로 끌어들였다. 또한 고려가 발해사를 찬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구려ㆍ발해 영토를 점령하고 있는 여진ㆍ거란에 대하여 영토적 권리주장을 내세우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발해고』의 사학적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사군지』

선생이 편찬하고 서유구(徐有?)가 교정, 필사한 것으로 한사군에 대한 총체 적인 사실정리를 한 책이다. 특히 이책 건치연혁에서 선생은 한사군은 본래 우리 나라의 땅 임을 전재하고 사군의 위치비정을 하였는데, 선생의 하사군의 위치 비정 중 가장 큰 특징은 사군의 위치에서 가장 의견이 분분한 진번군에 대하여 북방 고구려설을 주장한 데 있다. 선 생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에서 받은 민족적 치욕과 우리 민족의 역사활동의 무대이었던 북 방지역을 상실한 데 대해 우리나라 상사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을 통하여 자국사를 새롭게 이해하고 북방도 역시 우리 역사의 주 무대였음을 강조하여 우리 민족의 발전방향을 제시하 였다

『영재집』

선생의 시문집으로 15권 4책의 필사본이다. 이 문집은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원고의 상태로서 편집을 위해 여기저기 부전(附箋)이 붙어있고, 시(詩)도 선생이 중국 에 다녀오며 지은 시가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다. 선생의 시명(詩名)은 일찍부터 중국에 알려져 있었는데, 시 중에는 중국의 이조원(李調元), 반정균(潘庭均)으로부터 재기종횡(才氣 縱橫)ㆍ재정부유(才情富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과폐책(科弊冊)」은 과거의 종류, 과거 응시과목, 시관(試官)과 거자(擧子)의 부정행위 등을 열거한 것으로 과거에 대한 연구 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십일도회고시』

7언절구의 한시로 모두 43수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선생이 31 세였던 정조 2년(1778)에 『동국지지(東國地志)』를 읽고 한수 한수 틈틈이 지은 것인데 어 린아이와 어린 계집종조차 듣고 외울 정도로 마음을 썼다고 한다. 내용은 단군의 왕검성에 서 비롯하여 고려조의 송도에 이르기까지 21개의 왕도를 읊은 작품이다. 여기에 수록된 43 수는 우리 역사의 지나간 모습, 즉 민족적 삶의 총체적 양상을 각국의 왕도를 통하여 제시 함으로써 우리 것을 새롭게 인식하려고 하는 역사적 대응방식을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특히 우리 역사의 신비하고 장엄한 여명을 노래한 단군조선의 내용과 고구려 신화를 읊은 것은 더욱 돋보인다. 결국 이 시는 선생의 참신한 역사의식이 강렬한 시의식으로 변용되면 서 형상화한 것으로 내 것과 나를 찾으려고 하는 주체적 의식을 노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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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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