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봉영곡 작곡한 당대 문장가 백상형(白尙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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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32본문
●전하봉영곡 작곡한 당대 문장가 백상형(白尙瑩)
○생몰년도 : 1705~1789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순보(純甫), 호는 오헌(傲軒),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가족관계: 백시채(白時采)의 아들 ○출생 및 거주: 시흥시하중동 샛말(현 참이슬마을)에서 살았다. |
○생애 경종때 가선대부 첨지중추 부사를 지낸 뒤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정주(定州)로 유배된 아버지를 따라 18세의 나이로 배 행했다가 미처 돌아오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돌아올 정도의 효자였다. 선생은 평소 근검한 생활을 신조로 삼았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도 근검은 제일의 과제였 다. 선생의 일생은 오로지 경서(經書) 연구에만 몰두했다. 본래 서울에서 살다가 당시만 해 도 배가 드나들던 해변을 찾아 하중동 샛말에 정착했다. 선생은 이곳에 면포정(面圃亭)이란 정자를 짓고, 그 앞에 작은 연못 2개를 파서 물고기와 연꽃을 기르며, 주위에 갖은 꽃들을 가꾸고 소요자적하며 시(詩)를 남기기도 하고 때로는 명승지를 탐방하며 기행문과 시를 남 기기도 하였다. | 선생이 살았던 집터 : 현재 참이슬아파트가 들어섰다.(1995) |
선생은 경상도 의성에서 진사 김경천(金敬天 1675~1765)과 깊이 사귀면서 많은 시를 주 고 받았음이 선생의 문집 『오헌집』에 나타나 있다. 김경천은 한문소설 『염승전(廉丞 傳)』을 남긴 문인이다. 김경철 또한 선생의 하중동 집에도 자주들려 강세황, 조중보 등 세 칭 '안산팔문장'들과도 교유가 있었다.
선생이 하중동 고향집을 떠나 김경천의 의성집에 머문 것은 선생의 나이 53세 나던 영조 33년(1757)이었다. 이로부터 두 해 동안 선생은 그곳에서 머물면서 김경천과 술과 우의를 돈독히 했다. 당시 김경천은 의성현의 서리(書吏)를 세습하여 지내고 있었다.
위의 시는 의성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는 길에 쓴 작품으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노정(路 程)의 정서가 곡진히 배어있는 가작(佳作)이다. 시의 내용으로 보아 선생은 문경의 새재(鳥 嶺)을 넘는 도중으로 보여진다. '인적드믄 험준한 영마루' 그리고 '울부짖듯 바람결에 질척이 는 비' '저녁 시골집 사립문을 자욱히 덮은 차가운 늦가을의 연기' '고통스런 이웃들의 삶' 그러면서도 마음은 이미 따스한 고향마을의 낚시터에 가 있는 고향 그리운 서정을 오언율시 (五言律詩)로 곡진하게 그리고 있다.
선생은 만년에 정조가 호조벌 일대에 대한 간척사업을 실시할 때 임금이 친히 이곳을 행 차하자 임금을 위하여 '전하봉영곡(殿下奉迎曲)'이란 악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그리고 선생 의 아들 백사민(白師敏 1733~1799)은 문과에 급제하여 부자(父子)가 문명(文名)을 떨치기 도 하였다. 묘는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과외동에 있었다가 1980년대 말엽에 군부대 설치로 화장되었다.
○작품
선생이 하중동에서 살며 틈틈히 남긴 작품들을 한데 모은 『오현집』이 현재 시흥시 향토실에 소장되었는데, 이 책은 본래 선생의 6대손인 백남화(白南華 1933~ 하중동 514)가 오 랫동안 가전되어 오다가 시에 기증한 것이다.
책은 모두 176쪽으로 유일본이다. 첫머리에 7언(七言)율시 『기소주금상사경천(寄韶州金 上舍敬天)』을 시작으로 오헌이 평소에 쓴 시작품들이 실려 있다. 57쪽에 안산 8대 문장가 의 휘(諱)ㆍ호(號)ㆍ자(字)ㆍ출생연월일ㆍ본관(本貫)이 자세히 실려 있고, 127쪽에 조영경(趙 榮慶)이 찬(撰)한 오헌의 행장기(行狀記), 말미에는 가훈(家訓)이 각각 실려 있다. 특히 54쪽 의 오헌이 61세 때(1765) 강세황에게 보낸 글이 눈길을 끈다. 관계 전문가 등에게 의뢰, 면 밀히 연구하면 강세황의 거주지와 나아가 단원 출생에 관한 사항들까지 밝혀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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