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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정승 윤지완(尹趾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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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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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정승 윤지완(尹趾完)

○생몰년도: 1635~1718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숙린(叔麟), 호는 동산(東山),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가족관계: 이조판서 윤 강(尹絳)의 아들이며 좌의정 윤지선(尹趾善)의 아우. 
○생애 
선생은 2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28세에 증광시 을과에 4등으로 급제하여 39세에 설서에 제수된 뒤, 헌납ㆍ부수찬 등을 지냈다. 선생이 41세 되던 해(1675) 지평으로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여 경연에 나가 당쟁의 폐단 을 통박하고 덕원으로 유배된 송시열(宋時烈)의 신구(伸救, 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씻음) 를 건의했다가 당시 집권당인 남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그 뒤 46세에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한 이른바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용되어 부교리에 임명되고, 이어 부응교ㆍ경기도관찰사ㆍ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2년 후 통신사가 되어 일본에 파견 되었는데 이 때 일행은 부사 이언강(李彦綱) 등 475명이었다. 그 당시 일본측에서는 우리나라를 상국(上國)이나 문화적 선진국으로 인식하여 우리나라 사절을 맞이함으로써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정권의 권위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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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의 인장


  일본에 다녀 온 이듬해 가선대부에 올라 어영대장ㆍ예조판서 등을 거쳐 50세에 다시 경 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54세 때(1688) 병조판서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지중추부사 를 거쳐 한성부판윤,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이 해 기사환국으로 송시열 등 서인이 실 각하고 남인의 집권으로 파직되어 다시 유배되었다. 

선생이 60세가 되던 해(1694) 폐비 민 씨 복귀운동과 관련된 갑술옥사를 계기로 민씨의 복위를 지지한 소론이 등용함에 따라 유배 에서 풀려나 복직되어 좌참찬ㆍ우의정에 올랐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인 안산 동 산으로 내려갔다가 70세에 기로소에 들어갔다. 83세에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이 해 좌의 정 이이명과 독대를 했고, 세자(世子, 경종)에게 청정(聽政)의 어명이 있자 80 노구로 관 (棺)을 가지고 서울에 돌아와 이이명의 옥대(玉帶, 임금이나 높은 벼슬아치가 공복(公服)에 띤 띠)를 통박하고 세자 청정이 아직 시기가 이르다고 극언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이이명을 가리키며 "대신은 국왕의 사신(私臣)이 아니다"라고 통박하였다.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부인은 밀양박씨로 박천구(朴天球)의 딸이며,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숙종묘정(肅宗廟庭)에 배향 되었고, 경종 2년(1772)에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위패는 숭모각(崇慕閣, 시흥시 산현동 산 57)에 모셔졌다. 

○묘

  - 위치 : 본래 시흥시 산현동 안장바위에 있었으나 안산 어부들의 상소로 개성시 영통동 오관 산(五冠山)으로 천묘되었다.
  - 선생의 가장(家狀)과 년보(年譜): 손자 윤상희(尹尙喜, 1688~1753)가 지음.
  - 묘표: 내용-영의정 이종성(李宗城), 글씨-이광사(李匡師).
  - 묘지문: 대제학 윤순(尹淳)
  - 신도비: 대제학 이덕수(李德壽).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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