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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한 생활로 일관한 남인의 거두 권대운(權大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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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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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소한 생활로 일관한 남인의 거두 권대운(權大運)

○생몰년도: 1612~1699
○조선 후기의 문인. 자는 시회(時會), 호는 석담(石潭), 본관은 안동(安東).
○가족관계: 할아버지는 예조판서 권협(權?)이며, 아버지는 사어 권근중(權謹中)이다.
○생애 

선생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1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38세에 별시 을과에 3등으로 급제한 후 48세에 정언으로 복상 문제에 남인윤휴의 3년설을 지지하여 서인 송시열(宋時烈) 등의 기년설(朞年設)을 반대하였 다. 그 뒤 형조ㆍ병조ㆍ예조참의와 좌승지ㆍ한성부우윤ㆍ형조참판ㆍ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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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선현영정첩에서)
 

55세 되던 해(1666)에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고, 이어 대사간ㆍ함경도관찰사를 역임했 으며, 59세에 호조판서를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 뒤 우참찬이 되었고 판의금부사 를 겸임하였다. 63세 때(1674)에 숙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에 발탁되고, 이듬해 다시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허적(許積)과 함께 대공설(大功設)을 반대하고 기년설을 주장하여 서인을 몰락시키고 우의정에 승진되었고 이어 좌의정이 되었다.

69세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득세하자 판중추부사로 밀려 났다가 파직당한 뒤 영일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왕조 때 외부와의 접촉을 못하게 위리한 배 소 안에 중죄인을 가두어 두던 일) 되었다. 그 뒤 78세 되던 해(1689)에 기사환국(己巳換 局)으로 남인이 재집권하자 다시 등용되어 영의정에 올랐다. 이 때 유배 중인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사사(賜死)하도록 하였다. 이어 관직에서 물러나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 老所)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생의 나이 83세 때(1694) 남인이 숙종의 폐비인 민씨(閔氏)의 복위운동을 일으킨 소론을 제거하려다가, 오히려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숙종의 미움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절도(絶島)에 풀려났다.

이듬해 80세가 넘는 고령이라 하여 풀려나 귀향하게 되었다. 과격파 남인으로 당쟁에 휘말렸으나 생활이 검소하고 청렴하여 명망이 높 았는데, 죽고 난 뒤 임금의 특명으로 직첩이 환급되었다.
묘 : 시흥시 도창동 도두머리 마을(道頭里)에 있는데, 선생의 행적 등을 기록한 묘비나 신도비는 없다.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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