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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에 뛰어난 조선왕조 4대 문장가 장유(張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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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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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문에 뛰어난 조선왕조 4대 문장가 장유(張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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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n_arrow03.gif 영정(소장처 : 국립중앙박물관)

○생몰년도: 1587~1638
○조선 중기의 문인. 자는 지국(持國), 본관은 덕수(德水),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默所)이다.
○가족관계: 형조판서 장원익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성부 판윤 박숭원(朴崇元)의 딸이다. 또 우의 정 김상용(金尙容)의 사위이며,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아버지이다.
○시호: 문충(文忠)이다.

○생애

  어머니 박씨의 꿈에 빛나는 해가 몸을 비추더니 잠시 후 그 해가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후 임신을 하게되어 아버지가 수령으로 있는 평안도 선천부 내아(內衙)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타고난 재주가 있어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였던 듯 하다. 5세에 아버지가 형(장 륜 : 의금부 경력역임)을 가르칠 때에 곁에서 형이 배우는 것을 듣고 기억할 수 있었고, 7세 에 처음으로 책을 받아 글을 읽기 시작했다. 8세에 아버지로부터 시서(詩書)를 배우기 시작 했으며, 10세에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의 정문(正文)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모두 암송하였다.

  이렇듯 타고난 재주를 지녔던 선생은 몸이 약골이어서 생각만큼 책을 읽지는 못했다. 14 세에 마마를 앓다가 거의 죽을 뻔했고, 연이어 배탈이 나서 여러 해 동안 학업을 중단했다. 15세이 『시경』ㆍ『서경』 등 고문의 대의에 통했고 당대 명문장인 윤근수(尹根壽)에게서 『한서(漢書)』와 『사기(事記)』를 배웠다. 또한 예학(禮學)의 대가인 사계(沙溪) 김장생(金 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예(禮)를 배웠다. 16세에 선생의 장인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에 게서 한창려문(韓昌黎文) 수십 편을 배웠다. 때때로 모방하여 문사를 지었는가 하면 초사(楚 辭)와 문선(文選)을 읽었고 사부(詞賦)를 배웠다. 이렇게 하여 16세에 이미 경(經)ㆍ사(史)ㆍ 자(子)ㆍ집(集)에 달통하였다.
건립

숙종 2년(1676)

규모

높이 2.65m, 폭 1.3m, 두께 0.32m

비문

내용-영중추부사(領 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 글씨-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
전자(篆字)-광성부 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

주변

선생의 묘소 북쪽에는 인선왕후가 아버지(장유)의 천도를 위해 세운 법연 사(위치, 조남동 4)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선생의 종택(宗宅, 조남동 22)이 위치해 있다.  

맏딸은 아홉 살이 지났고

막내딸은 겨우 돌박이이며

둘째딸은 막 일곱 살인데도

슬기로워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네.

가장 잊지 못할 앤 아철이니

불쌍케도 생김새가 기이해

때로는 성을 내며 책장을 어지럽히고

대추 배 내놓아라 귀찮게도 굴었지

평소 눈 앞에서 보던 것처럼

생생히도 마음 속 깊이 남아 있는데

손바닥 안에 있던 네 구슬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갔네.

예쁜 꽃술처럼 참으로 귀엽기도 했는데

비바람에 남은 것이 없는 텅 빈 가지.

내버려 두고 억지로 마음을 펴고 눌러 보지만

생각할수록 스스로를 지탱하기 어려워

상여에 실어다 빈 산에 묻으니

네 무덤 서로 보루처럼 의지하네.

하늘을 향해 통곡하노라니

뜬구름도 날 위해 더디 가네.

악덕을 쌓아 재앙을 불렀으니

어디를 향해 원망할 것인가

동문오 같은 이를 생각해 보면

정 떼지 못하는 일 부끄러워라.


   장곡동에 은거한 지 6년째 되던 32세에는 은거기에 지은 글을 모아 『묵소고갑(默所稿甲)』 4권 2책을 편찬하고 자서(自序)를 지었다. 이후 영서지방을 돌며 유람하기도 했지만 심한 편혈 증세로 피를 쏟기도 했다.


  37세 되던 해(1623) 3월에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조정에 복귀했다. 장곡동에 은거한지 12 년만이었다. 예문관 대교를 제수받은 후 봉교ㆍ전적ㆍ예조좌랑이 되었고 이조좌랑ㆍ지제교 겸교서교리ㆍ암행어사ㆍ이조정랑 등을 두루 역임했다. 38세(1624) 이후 3년간 대사성ㆍ부 제학ㆍ네 번, 대사간ㆍ대사헌 다섯 번, 이조참판 세 번씩이나 하면서 그동안 쌓을 학력과 덕을 아낌없이 쏟아 부어 인조반정 뒤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조정의 중신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41세에 이조판서에 올랐는데, 청렴함과 공정한 인재 등용으로 칭송이 자자했다.


  42세에 이조판서에 대제학 지성균관사를 겸하였고 뒤에 우참찬이 되었다. 나라에 어려움 이 있을 때마다 왕이 방책을 물으며 그때마다 왕의 비위를 건드리는 일이 있어도 직언을 서 슴지 않았다. 43세에 되던 해(1629) 7월에는 나주목사로 좌천되어 재임시 형옥을 분명히 처 리하고 징세를 가볍게 할 뿐만 아니라 고을 자제들과 시서를 토론하며 그들의 학문을 진작 시키는 등 목민관으로서 치적이 높았다. 목사직을 그만두고 떠나자 나주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우고 덕을 기렸다.


  44세에 형조판서, 대사헌으로 있다가 45세에 좌부빈객, 대제학, 예조판서에 제수되었다. 49세에 병이 뜸할 때마다 글을 조금씩 지어 『계곡만필(谿谷漫筆)』을 완성하였다. 50세 되 던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 어머니를 강화도에 보내고 병든 몸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달려갔다. 이 때 최명길과 함께 강화론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부음(訃音)으로 18차례나 사직소를 올려 끝내 사퇴하였고, 장례 후 과 로로 병사하였다. 남겨 놓은 재산이 없어 왕이 급료를 주라는 명을 내렸다.


 『인조실록』의 선생에 대한 평가 ① 선생은 타고 난 자질이 총명하다. 선생의 총명한 자질에 대해서는 선생 자신도 자부한 적이 있 다. 선생이 5세에 형이 배우는 것을 옆에서 듣고 기억하자 선생의 아버지가 기특하게 여겼 다고 회상한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몸이 약골이었음에도 여러 분야의 많은 책을 읽었다. 이러한 선생의 교육과정 전반을 볼 때 선생의 총명한 자질이 아니면 소화하기 어려 운 양이라 하겠다.


② 학식이 깊고 문장력이 뛰어 났다. 선생이 오랫동안 관직에 있을 수 있었고 어린 나 이에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선생의 뛰어난 문장력과 해박한 학식 때문 이었다. 선생은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때로는 왕의 의지와는 다른 주장을 펴서 굽 히지 않은 적도 있었다. 인조가 그의 아버지를 원종(元宗)으로 추숭(追崇)하고자 하였을 때 선생은 그것이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며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그러나 인조는 오히려 선생 을 내치지 않고 추숭이 완료된 뒤에는 상을 내리기까지 하였다. 인조 또한 공개적으로 선생 의 학식과 문장력이 뒤어나서 조정에 꼭 필요한 인물임을 여러 번 말하였 다. 한 번은 선생 이 우빈객(右賓客)에 임명되자 그 직을 사양하였다. 이 때 인조는 "공(장유)은 덕이 있고 실 행함이 있으며 학식이 있고 재주가 있으니 그 직임에 적당하다"고 들어주지 않았다.


③ 선생은 염정(염 렴 靜, "안정"을 뜻함)하고 청렴한 사람이다. 선생은 단정 하고 담박하여 경망스럽지 않았으며, 영욕에 대해서 크게 집착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선생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선생은 과거시험 공부만을 위해서 문장공부를 하지 않았다. 선 생은 당시의 문풍을 의식했고, 그 문풍을 계도할 사명을 의식하였다. 그래서 문장에 대한 수련을 계획적으로 진행하였고, 자기다운 문장을 지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선생은 훗 날 조선왕조 4대가 중의 한 문장가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선생은 훌륭한 산문가였지 만 시는 잘 못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시에 대해 일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나 름대로 원칙을 세워서 시를 지었다. 그 결과 1천여편이 넘은 작품을 남겼다.


문장 및 산문


선생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순조롭고 탁 트인 맛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은 "선생의 문장은 우리 나라 제일"이라고 했고,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 며 문장의 대가인 김창협(金昌協)은 "선생의 문장은 모범적이고 아름다우며, 앞뒤로 통하여 막힌 데가 없고, 말의 이치가 구비되었으며, 체재가 구차하지 않은 우리 나라에 있어서 정 말 대가에 해당한다."고 극찬하였다. 김창협과 같은 시대의 비평가인 홍만종(洪萬宗)은 "장 유의 문장은 혼후유창(渾厚流暢)한 것이 큰 호수가 만만(漫漫)한 것 같으며 미풍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여러 사람들의 이런한 평가는 선생의 문장이 그 형식면에 있어 서 완벽에 가깝게 잘 가꾸어져 있음을 말한 것이며, 그 전개가 또한 논리정연하고 평이하면 서도 가볍지 않음을 지적한 것이라 하겠다.


 신도비명 탁본

  선생이 남긴 산문은 조선시대 다른 문인들도 남겼던 관습적 양식들이 대부분이다. 외교문 서가 대부분인 표(表)와 전(箋), 왕의 명령을 대언하는 교서(敎書),와 비답(批答), 책문, 잠ㆍ 명ㆍ찬ㆍ논ㆍ변ㆍ설류, 서ㆍ기류, 재문, 모지, 묘갈, 비명, 행장 등의 행장류와 계ㆍ주 ㆍ소 ㆍ차 등의 상소문류 등이 그것이다. 이 밖에 잡저류로 『계곡 만필』이 있다.

학문 성향

일찍이 양명학(陽明學)에 접해 당시 주자학(朱子學)의 편협한 학문풍토에 대하여 학문에 실심(實心)이 없기 명분에만 빠지게 되면 허학(虛學)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였다. 또한 지행 합일(知行合一)을 주장, 마음을 바로알고 행동을 통하여 진실을 인식하려고 하였던 양명학 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식(李植)은 그의 학설이 주자(朱子)와 반대된 것이 많다고 하여 육왕학파(陸王學派)로 지적하였다.


-위치: 시흥시 조남동 산 1-5에 있고

-신도비와 함께 1986년 3월 3일 향토유적 제2호로 지정.

-신도비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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