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과 함꼐 순절한 만고의 충신 원성모(元成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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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43본문
● 두 아들과 함꼐 순절한 만고의 충신 원성모(元成模)
○생몰년도: 1569~1636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경범(景範), 호는 송운(松耘),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초명(初名) 은 종모(宗模). ○가족관계: 할아버지는 이조판사 원계검(元繼儉)이며, 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郞) 원호영 (元虎英). ○시호: 충의(忠毅). ○생애 장군은 어려서부터 다른 아이들보다 자질이 뛰어나고 지략 또한 비상하였으며, 효(孝)를 실천하고 하늘을 공경하여 지체지양(志體之養)과 거상지절(居喪志節)이 극진하였다. 또 형제 간의 우애가 두터워 서로 의리를 지키고 화목하게 지내 주위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중과부적으로 기력이 떨어지고 무기도 바닥이 나는 등 싸움의 형 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고향에 두고온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은 일종의 유언장을 적어 그것을 화살에 매어 덕물도에서 이곳 정왕동 배나루로 향하여 활시위를 당겼다고 한다. 덕물도에서 배나루와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는데, 그 화살은 시위를 떠나자 허공을 가르질 러 이 배나루에까지 날아와 산중척에 닿았다. 이때 장군의 가족들은 전쟁터에 나간 장군으 3부자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에 어느날인가 화살이 날아왔는데, 그 끝에 종이 묶음이 달려있 어 풀어보았더니 바로 원성모장군의 유언장이 아니던가? 이리하여 덕물도에서 머물었던 선생의 소원대로 자기의 생각한 바를 그대로 가족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얼마후 장군의 3부자가 덕물도에서 순절하자 화살이 떨어진 자리에 후손 들이 3부자의 장례를 치렀다. 그 후 352년이 경과한 1988년에 이곳 일대가 시화공단 토취구역으로 편입되자 후손들이 이장을 하기 위해 산역을 시시했는데 미이라로 발견되어 모두들 놀랐다고 한다. 얼굴의 형 태며 수염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란 것은 당신 전투에 입었던 속옷과 겉옷은 물론 관복(上ㆍ下)까지도 하나도 변색되지 않은 채 원성모장군이 청 나라 군사의 칼로 옆구리 두 군데를 맞아 순절, 그 혈흔(血痕)이 관복에 스며 벌겋게 있더 라는 것이다. 군이 순절한 뒤 공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이어 숙종조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흥시에서는 이러한 장군의 우국충정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일환으로 장군 이 순절한 지역에 정왕동의 송운초등학교와 송운중학교의 교명 및 송운마을의 마을명을 각 각 제정하였으며, 2001년에는 옥구공원안에 공적비를 건립할 계획이다. ○묘 시흥시 정왕동 배나루에 있었으나, 이곳 일대가 시회지구 토취장에 편입되자 1990 년경 분래의 묘에서 서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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