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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외교에 큰업적 이룬 공신 박동량(朴東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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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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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외교에 큰업적 이룬 공신 박동량(朴東亮)

○생몰년도: 1569~163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룡(子龍), 호는 오창(梧窓)ㆍ봉주(鳳州),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가족관계: 아버지는 대사헌 박응복(朴應福), 어머니는 임구령(林九齡)의 딸. 부인은 승지 민선(閔善)의 딸인데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음

○생애  

선생은 두어 세에 책을 읽기 시작하여 곧 글뜻을 깨달았으며, 21세가 되던 해(1589)에 사 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시에 병과로 13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정자에 등용되다. 이어 추천에 의해 검열에 제수되었으며, 계속해서 검열ㆍ대교ㆍ봉교 등을 지냈다. 24세 때 (1592)에 호조좌랑을 역임하고 이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 임금을 의주로 호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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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적

선생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임금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에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국 외교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또한 임금의 신임도 두터 웠다. 이듬해 10월에 임금이 돌아와 해주에 머물 때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이어 좌승지를 거 쳐 도승지에 제수되었다. 28세에 이조참판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1597) 정유재란 때에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보살폈다.  

그 뒤 연안부사ㆍ경기도관찰사ㆍ강원도관찰사 등으로 재직 중에는 임진왜란 이후 민생회 복에 힘썼다. 36세(1604)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금계군(錦溪君)에 책봉되고 호조판 서에 제수되었으며, 40세 때(1608) 선조가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으로 3년간 수묘(守墓) 하고 43세에 판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일찍이 선생은 선조 때부터 한응인(韓應寅), 류영경(柳永慶), 서성(徐筬), 신흠(申欽), 허성 (許筬), 한준겸(韓浚謙)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바 유 교칠신(儒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대북파(大北派)의 질시 대상이 되었다. 44세(1612) 김직재 (金直哉)의 무옥사건(誣獄事件)이 일어나자 추관(推官)으로 있던 선생이 무고임을 알고 연루 자들을 용서하려 하다가 더욱 미움을 받아, 그 뒤로 자주 탄핵을 당하여 문외출송(門外黜 送)당하였다. 그 후 곧 풀려나와 복관이 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모반혐으로 심문을 다가 혐의가 희박하여 극형은 받지 않았는데, 이 때 반역관계를 극구 부인하면서 선 조가 붕어할 당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사주로 궁녀들이 유릉(裕陵)에 저주한 사실은 시인 하는 태도를 보였다.  

55세(1623)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계축옥사 때 유릉 저주사건이 무고임을 알면서도 시 인해서 인목대비로 하여금 유폐생활의 곤욕을 치르게 한 죄로 강진(康津)에 유배되었다. 이 어 부안(扶安)을 거쳐 충원
 (忠原)으로 옮겨지고 64세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선생은 서호(西 湖)위에 집을 사서 여생을 세웠다. 그러나 하루저녁에 갑자기 담이 올라와서 그날 밤으로 사망하니 향년 67세였다. 그 뒤 아들 박미(朴彌)와 박의(朴?)의 상언(上言)으로 복관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선생은 보통 키에 얼굴색이 검고 수염이 얼굴을 덮었으며, 성품이 솔직하여 때로는 유가 의 세속에 얽매이지 않았다. 사환훈귀(仕宦勳貴)를 누렸으나 가산(家産)을 늘리지 않았으며, 고향 사람들이나 친지들은 그를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믿음성 있는 사람이라고 일컬 었다. 선생은 또 궁한 사람을 동정하고 곤란한 사람을 도울 때에는 귀천을 두지 않았다. 관 직에 있을 때에는 절대로 사정(私情)에 흔들리는 일이 없었고, 일을 당하여 강개할 때에는 곧장 밀고나가 피하지 않았다. 일생을 사는 동안 특별히 즐기고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며, 오직 술만을 즐겨 마셨으나 크게 취하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용만(龍彎)에 있을 때에는 미 녀들이 즐비했으나 문닫고 들어앉아 마치 처자(處子)처럼 자수(自守)하자 주위의 사람들이 그 지조와 행실에 탄복하였다. 한가할 때는 서적을 가까이하였고, 흥이 나면 글씨쓰기를 좋 아하였으며, 그 외에도 산수(算數), 녹명

○묘소 (1998) 
    신도비각 (1999) (祿名), 궁굴과 마술 등 모든 기예에도 능하였다. 친교가 두터웠던 인물로는 김상헌(金尙憲)ㆍ김상요(金尙容) 형제가 있다. 저서로는 『기재 사초(寄齋史草)』, 『기재자기(寄齋雜記)』, 『방일유고(放逸遺稿)』, 『오창집(梧窓集)』 등 이 있고, 그림으로는 「계산초정도(溪山草亭圖)」가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와 신도비
 - 위치: 시흥시 군자동 산 22-2에 있으며
 - 1988년 5월 31일 향토유적 제12호로 지정.
 - 신도비
○건립시기 : 영조 1년 (1725)

○비문
내용: 이조판서(吏曹判書) 김상헌(金尙憲)
글씨: 판중추부 사(判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
전액(篆額): 형조판서(刑曹判書) 민유중(閔維重)

 - 1993년 10월 24일 반남박씨오창공파종중(도유사 박찬기)에 의해 신도비각과 사적비가 건립.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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