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학에 밝은 부원군 한준겸(韓浚謙)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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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5:06본문
●문학과 예학에 밝은 부원군 한준겸(韓浚謙) 선생필적(소장처:한걸택)
○생몰년도: 1557~1627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본관은 청주(淸州). 인조의 장인
○가족관계: 아버지는 판관 한효윤(韓孝胤), 어머니-예빈시 정 신건(申健)의 딸. 회산부부인(檜山 府夫人) 창원 황씨와의 사이에 2남 6녀를 두었다.
○출생 및 거주: 한성 남부 훈도방(薰陶坊) 에서 출생.
○시호: 문익(文翼)
○생애
6세에 종모(從母) 신씨의 손에서 자랐는데, 이 때 능히 글을 짓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29세에 태릉참봉에 제수되 었다. 이듬해 별시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이 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고 이어 홍문관 정자에 재임 중 임금이 글 제목을 내어 홍문관의 관원들에게 제진(製進)토록 했는데 선생이 수석을 하여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요를 하사받았다.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본관은 청주(淸州). 인조의 장인
○가족관계: 아버지는 판관 한효윤(韓孝胤), 어머니-예빈시 정 신건(申健)의 딸. 회산부부인(檜山 府夫人) 창원 황씨와의 사이에 2남 6녀를 두었다.
○출생 및 거주: 한성 남부 훈도방(薰陶坊) 에서 출생.
○시호: 문익(文翼)
○생애
6세에 종모(從母) 신씨의 손에서 자랐는데, 이 때 능히 글을 짓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23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29세에 태릉참봉에 제수되 었다. 이듬해 별시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여 이 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고 이어 홍문관 정자에 재임 중 임금이 글 제목을 내어 홍문관의 관원들에게 제진(製進)토록 했는데 선생이 수석을 하여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요를 하사받았다.
32세에 주서로 옮겼다가 이듬해(1589) 금천현감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이 선생에게 노모 가 계신 것을 알고 사가독서(賜暇讀書, 유능한 젊은 문신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에서 공부하게 하는 일) 하였다. 그러나 이 해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李震吉)을 천거한 일로 연좌되어 옥에 갇혔다가 수개월만에 풀려나와 원주로 이사하여 농사를 지었다.
36세 되던 선조 25년(1592)에 서용(敍用)되어 예조좌량에 제수되었고, 이어 예조정랑ㆍ강 원도사ㆍ시가원 사서를 거쳐 그 해 겨울에 원주목사가 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 다. 그 뒤 내직으로 지평ㆍ필선ㆍ정언ㆍ교리 등을 지내고 도체찰사 류성룡(柳成龍)의 종사 관이 되어 황해도와 평안도를 순찰하였다. 이어 부수찬ㆍ경상도관찰사ㆍ교리 겸보덕ㆍ검상 ㆍ사인ㆍ부응교ㆍ사간ㆍ집의 등을 두루 거쳤다. 41세(1597)에 전한(典翰)에서 특별히 동부 승지에 임명되었다가 곧 좌부승지로 승진했는데, 이 때 왜적이 기호지방에 당도하자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를 도와 마초(馬草)와 변량(兵糧) 보급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곧 우승지를 거쳐 경기감사를 역임하고, 42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첨지 중추부사고 있다가 대사성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에 재임 중 정인홍(鄭仁弘)의 압력으로 파직당했다. 44세에 병조참판을 지내고, 47세에 예조참판ㆍ부제학을 역임하고 48 세(1604)에 호조판서에 승진된 뒤 대사헌을 거쳐 한성부 판윤ㆍ평안도관찰사를 지냈다. 특히 함경도관찰사에 재임 중에 『가례』 등의 책을 간행, 보급하여 학문을 진흥시켰다.
선조로부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유교칠신(儒敎七臣)의 한 사람으로 57세 때(1613)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류되어 전리방귀(田里放歸)되었고, 61세에 충주에 부처(付 處)되었다. 그 뒤 65세 되던 해(1621)에 여주로 옮겼다. 이 해 오랑캐 침입의 위험이 있자 이에 대비할 책임자로 뽑히어 유배지에서 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5도도원사가 되어 국경 수비에 힘썼다.
67세(1623)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딸이 인렬왕후(仁烈王后)로 책봉되어 영돈령부사고 서 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임금을 공주에 호송 하고 돌아와 겸지춘추관사(兼知春秋館事)로 『광해군일기』 편찬에 참여했다. 71세(1627)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자를 전주에 호종하였고, 이 해 7월 17일에 병을 얻어 서울 회현동 자택에서 죽어 9월에 원주 음지촌(陰地村)에 장사했다. 그 뒤 지관이 이르기를 "이곳은 지 세가 불리하여 후손이 영락(零落)하겠으니 옮기라"는 말에 따라 선생의 장남 한회일(韓會一) 이 인조 14년(1636) 5월 17일에 안산군 대월리(현 시흥시 거모동 산 62)에 이장하였다.
선생은 풍모가 준수(俊秀)하고 기백이 완연하였으며, 사물에 접하면 혼연(渾然)이 온화한 기색이 가득 찼다. 또 선비를 좋아하고 학문에 힘썼는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으 며, 국가의 고사(故事)나 문헌전장(文獻典章) 등에 밝았다. 저서에 『유천유고(柳川遺稿)』가 있으며, 함흥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다.
○묘와 신도비
지정문화재 : 청주 한씨 문익공파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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