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언서판의 청백리 성세장
○생몰년도: 1506~1583 ○조선 중기의 공신ㆍ문신 자는 중회(仲晦)ㆍ경회(景晦), 호는 사암(思庵),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가족관계: 감찰 성희문(成希文)의 아들이나 증이조판서 성희적(成希赤)에게 입양되었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생애 선생은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년 뒤 식년시 갑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에 제수되었다. 이어 시강원 설서를 거쳐 이듬해(1541) 성균관 전적을 역임하고, 38세에 춘추관 기주관을 지냈다. 40세 때(1545)에는 임금을 시위한 공로로 원종 훈(原從勳)에 오르고, 지평으로 있을 때 최보한(崔輔漢)을 탄핵하는 등 기강확립에 힘썼다. 41세에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43세에 사재감 정으로 춘추관 편수감을 겸대하여 『중종실 록』과 『인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그 뒤 사인ㆍ집의ㆍ경기도 암행어사ㆍ직제학ㆍ도승지 ㆍ경기감사 등을 역임하고 53세 되던 해(1558)에 대사헌으로 윤원형(尹元衡)ㆍ이양(李樑) 등 외척을 견제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ㆍ예조참판ㆍ한성좌윤 등을 지내고, 58세에 함경감 사를 역임했다. 이 무렵 한성부 판윤ㆍ호조판서를 역임하고, 68세에 등극부사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예조 판서ㆍ호조판서 에 이어 2년 뒤 좌참찬에 임명되었다. 이어 예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내고 74세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향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부인 상주 김씨와의 사이 에 1남 5녀를 두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성품이 간정(簡靜)하고 풍모가 맑고 단정하였으며, 술을 가까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허튼 담소도 없었으며, 언어는 항상 충심, 신의가 있어 비속한 언사는 입에 담질 않았다. 재 물에 항상 무관심하고 검소했으며, 여색(女色)과 오락 같은 번화한 일에 마음을 둔 적이 없 었다. 네 분의 임금을 섬겨 모두에게 우대를 받아 때로는 낙루한 옷깃을 적시기도 해 누추 상소한 일이 있었지만, 혹 좋은 옷이 생기면 곧 태워버렸다. 또 관직에 재임 중에는 공사가 분명하여 이기ㆍ구수담(具壽聃)에게 죄를 주려는 데 대한 잘못을 통렬히 논박하기까지 했다. 언론이 강개하여 조정의 모든 요속들의 기운을 움직였고, 실없이 누구를 비방하거나 칭송함 이 없고, 변란을 당할 때나 역경에 임해서는 근본 의지에 굽힘이 없이 충성으로 일관했다. | 청화백자 지석 (소장처:성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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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 - 위치 : 시흥시 미산동 구시미. 원래의 묘는 경기도 양주군 금촌리에 안장했는데, 광무4년(1900) 금촌리 일대가 왕릉지 (王陵地)에 편입되자 현 시흥시 안현동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와 창녕 성 씨 문중이 이곳을 매각하면서 창녕 성씨 선산인 미산동 구시미로 다시 이장하였다. - 선생의 행장(行狀): 사복시 정(司僕侍正) 지제교(知 製敎) 성락(成洛)이 지었음. - 지석(墓誌?)
건립 | 선생이 죽은 다음해인 1584년 | 발견 | 1990년 4월 15일 창녕 성씨 후손들이 묘비를 다시 세울 때 묘비 밑에서 발견 | 작성자 | 내용-좌의정(左議政) 김귀영(金貴榮), 명(銘)- 외조부 강초당(姜草堂)이 정선객 관(旌善客館) 현판에 게재했던 시를 빌어와 달았다. | 글씨 | 글씨- 밝히지 않았음. 글자체-해서체를 사용. | 크기 및 갯 수 | 가로 19.1cm, 세로 21cm, 총 22개(선생의 지석 (14개 총 길이 2.72m), 선생의 부인 안동 김씨 지석 8개(4개씩 2조, 총 길이 76cm)였다.) | 상태 | 일부 깨진 지석도 있으나 대체로 보존상태가 양호해 지문(誌文) 판독에는 어려움이 없다. 청화백자(靑華白磁)를 네모나게 구워 만들었음. 표제문(表題文), 내용, 명 (銘), 지은이까지 완벽하게 갖추고 있음. 선생의 지석에는 번호가 없지만, 부인의 것에는 지 석순서에 따라 지석 상단 중앙에 '일(一)ㆍ이(二)ㆍ삼(三)ㆍ사(四)'라는 번호를 달고 있다. | 구성 | 선생 | 유명조선국자헌 대부의정부우참찬겸지의금부사성공묘지명 (有明朝鮮國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義禁府事成公 墓誌銘) | 부인 | 정부인안동김씨묘지(貞夫人安東金氏墓誌) |
지문 내용: 이름, 선대가계, 출생, 출생지, 관력, 행적, 고인의 품성 등을 차례로 적고 마지막에 지은이와 명(銘)을 달았다 선생의 생전 행적과 관력 내용을 시간의 흐름에 자세히 기록 | 소장 및 관리 | 현재 창년 성씨 15대 종손인 성일제(成一濟)가 선생과 부인의 지석들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는 성순제(成順濟)ㆍ성용제(成龍濟) 형제와 함께 미산동에 거주하면서 선산을 돌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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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