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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와 시부에 능한 공신 정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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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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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사와 시부에 능한 공신 정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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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1995)

○생몰년도: 1442~1503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효숙(孝叔), 호는 삼성재(三省齋), 본관은 하동(河東)이다.
○가족관계: 영의정 정인지(鄭麟趾)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판한성부사 이휴(李携)의 딸.

○생애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훌륭한 가풍을 이어받아 주위로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17세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통례문봉례랑(通禮門奉禮郞) 에 제수되었다. 이어 주부ㆍ부전첨ㆍ공조좌랑ㆍ종부시소윤을 거쳐 24세에 절충장군 겸 지사 간원사에 올랐고, 26세에 첨지중추부사

에 임명된 뒤 이조참판을 역임했다. 2년 뒤에 공조참 판을 지내고, 30세에 좌리공신 4등으로 하남군(河南君)에 봉해졌다.  

 33세가 되던 해(1474)에 형조참판, 36세에 한성부 판윤으로 있으면서 도총관을 겸하였고, 이어 지의금부사를 거쳐 47세에 하남부원군에 진봉되었다. 이듬해 다시 한성부 판윤에 임명 되었고, 그 뒤 경상도 관찰사ㆍ경상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54세에 정조사(正朝使)가 되 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사섬시 제조가 되어 다시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59세 때(1500) 숭정대부에 올랐으나 사직하자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62세 되던 해(1503) 2 월 13일에 타계하자 왕이 부의(賻儀)를 내려 예를 갖추어 장사하였다.


  선생은 대학자이며 훈신인 정인지의 아들로서 40여 년간을 봉직하는 동안 왕의 총애가 남달랐다. 관직에 물러나 집에 있을 때에는 오로지 악기를 만지며, 독서를 낙(樂)으로 삼았 다. 특히 경사(經史)와 시부(詩賦)를 즐겨 읽었으며 강론함에 있어서 말이 물 흐르듯 하였다. 시호는 장정(莊靖)이다.


○묘 - 위치: 시흥시 광석동 4(축실).

- 신도비:

위   치 : 묘에서 북쪽으로 약 400m 지점

건   립 : 1985년 10월

건립자 : 후손 정재설(鄭在卨)ㆍ정중현(鄭仲鉉, 전 종로경찰서 서장)ㆍ정형묵(鄭 亨默)ㆍ정현채(鄭玄采)

비   문 : 내용-대제학 김안국(연산군 9년(1503))

번역-정순목(鄭淳穆)ㆍ정봉채(鄭鳳采)ㆍ정갑채(鄭甲采)

글씨-후손 정숙현(鄭淑鉉, 수암면장)

- 선생의 시장(諡狀)은 용양위 부사직 남태제 (南泰齊)가 지었음,

- 1995년에는 선생의 아호 명을 취한 재실 삼성재(三省齋)를 신도비 오른쪽에 건립.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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