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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문화 창조한 첫 농학자 강희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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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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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성문화 창조한 첫 농학자 강희맹
○생몰년대: 1424~1483
○조선시대의 공신ㆍ학자ㆍ문신이다.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 居士)ㆍ국오(菊塢)ㆍ만송강(萬松岡)ㆍ무위자(無爲子),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가족관계 : 지돈령부사(知 敦寧府事) 강석덕(姜碩德)의 둘째 아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 顔)의 아우이며, 세종의 이질(姨姪).
○글씨: 원각사비(圓覺寺碑)의 전액(篆額)과 아버지의 묘표(墓表) 액서(額書), 합천홍류동 비필암각(陜川紅流洞?筆岩刻)
○저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私撰) 농 서(農書)인 『금양잡록(衿陽雜錄)』, 성종의 명에 따라 서거정(徐居正)이 편찬한 『사숙재집(私淑齋集)』 17권과 『촌담해이(村談解?)』 등
○시호: 문량(文良).
○생애
24세(1477)에 별시(別試)에 을과(乙科)로 장원급제한 뒤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가 되었 다. 27세(1450)에 예조좌랑과 돈령판관을 지내고, 30세(1453)에 예조정랑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1455)하자 원종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그 뒤 예조참의, 이조참의를 거쳐 40세(1463) 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 경(南京)에 있는 전당지(錢塘池)에서 연꽃씨(蓮子)를 가지고 귀국하여 하중동 208에 소재한 관곡지(官谷池)에 식재하여 널리 퍼졌다. 그 이듬해에 부윤으로서 어제구현재시(御製求賢才 試)에 2등으로 합격하고, 이어 43세(1466)에 발영시(拔英試)에 갑과(甲科)로 3등, 등준시(等 俊試)에 갑과로 2등에 각각 급제하여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다. 이어 예조판 서ㆍ형조판서를 지냈다.
예종이 즉위하던 해(1468)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어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48세(1471)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 록되었다. 그 해에 지춘추관사로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50세(1473)에 병조판서가 되었고 계속해서 판중추부사, 이조판서, 판돈령 부사, 우찬성을 지낸 뒤 성종 13년(1482)에 좌찬성(佐贊成)에 이르렀다.
선생은 2살 때 작은 아버지 강순덕(姜順德, 1398~1459, 사헌부 감찰 역임)에게 양자(養 子)로 입적되어 어릴 때는 양어머니와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 12살에 친아버지에 의해 교육 을 받도록 권유받았다. 어려서부터 독서에 전념하여 다른 기예(技藝)는 종사하지 않았고 타 고난 성품이 총명하여 한번 보면 기억하였다. 12살 때 당대의 문신ㆍ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김예몽(金禮蒙, 1406~1469)이 산사에서 선생을 보고 기특하게 여긴 끝에 사찰 앞에 있는 고목(古木)을 가리키며 운자(韻字)를 불러주자 선생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말하기를

한 그루 고목이 봄바람을 띠고서
텅빈 산 아지랑이 속에 홀로 서 있네
예상컨대 해마다 꽃비가 내린 뒤에
몇 가지나 떨어지고 몇 가지나 붉었느냐

하자 김예몽이 감탄해 마지 않았다. 선생이 비록 부유한 가문에서 성장하였으나 벼슬을 마 음에 두지 않았 으므로 24살이 되도록 억울하게 서민의 신분으로 있었다. 그때 국가에서 선 대의 음덕이 있는 가문의 자손을 모집하여 충순위(忠順衛)를 설치하였는데, 그곳으로 나가 면 벼슬길이 상당히 빨랐다. 아버지가 “너의 나이 약관(弱冠)이 넘었으므로 공명(功名)을 기 필할 수 없으니, 충순위에 소속하도록 하라”고 하자 “머리털이 하얘지도록 경전을 연구하는 것을 선비가 해야 할 본분의 일입니다. 감히 하나의 품계를 위해 병사의 대열에 낄 수 있겠 습니까?” 하자 아버지가 기뻐 말하기를 “내가 너의 뜻을 시험해 본 것이다.”고 하였는데, 이해 가을에 시행한 별시(別試)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40살 때 중추원 부사로 연경(燕京)에 갔는데 중국의 선비들이 ‘강희맹이 글을 잘 짓는다’ 는 소문을 듣고 시(試)를 요구한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의 형인 강희안이 연경에 갔을 때 문장과 서화(書畵)로 중국의 선비들에게 큰 칭찬을 받았는데, 선 생의 문아(文雅)를 보자 서로 탄복하였고, 그 뒤 우리나라 사신을 보면 반드시 강희안 형제 의 안부를 물어 보았다.

세조가 일찍이 여러 신하들에게 대해 평(評)하기를 “나의 신하중 제일가는 신하가 셋이 있는데 한계희(韓繼禧)는 미묘(微妙)가 제일가고, 노사신(盧思愼)은 활달이 제일가고 강희맹 은 강명(剛明)이 제일간다.”할 만큼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44살에 형조판서가 되었는데, 그 때 도둑이 성행하여 경기도의 안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겁탈이 자행되었으나 선생이 옥사 (獄事)를 엄격하고 명확하게 다스리자 도둑이 사라져 한해가 지나자 서울이 옥(獄)이 텅 비 었다.
선생이 큰 아들 강구손(姜龜孫)을 훈육하기 위해 지은 훈자오설(訓子五說)에서 명문가 자 제가 처신해야 할 도덕(道德)ㆍ성색(聲色)ㆍ재리(財利)ㆍ덕업(德業)ㆍ교우(交友)ㆍ행실(行實) 등에 관한 문제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면서 “부지런함에 전념할 것을 당부하였다. 훈자오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다소 비속한 내용 예컨대, 시장바닥에서 오줌누는 이야기등을 예로 들면서까지 이야기 전달방식에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선생은 할아버지 강회백(姜淮伯)과 아버지 강석덕, 형 강희안의 시집인 『진산세고(晋山世 稿)』를 편찬했으며, 세조 때 『신찬국조보감』, 『경국대전』의 편찬과 『사서삼경 언해』, 성종 때는『동운선』,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서례』의 편찬에도 참 여했다. 특히 선생의 저술로서 주목되는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찬(私撰) 농서인 『금양잡 록(衿陽雜錄)』의 저술이다. '금양'은 시흥의 태종 때(1414~1416)의 이름이다. 
선생이 52살 에 좌찬성에서 물러나 처가인 경기도 금양현(옛 시흥군 동면 시흥리, 현 서울시 금천구 시 흥 4동 812)에 있는 묘막에 은거하여 손수 농사를 지으며 그 곳 노농(老農)들과의 대화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지었다.
이 농서는 조선초기의 농사기술에 관한 저서인 『농사직설』과 쌍벽을 이루는 저서이며, 농사직설이 관찬(官撰)인데 반하여 이 책은 저자 개인의 경험과 견문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서 당시 시흥지방의 농업사정을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다음의 시는 선생이 벼슬길에서 잠시 머물렀던 시절 금양별업(衿陽別業)(*안승효가 사위 인 선생에게 물려준 토지 또는 별장)에서 머물면서 읊은 작품이다.
          
           <전략>
금양에 누워서 문을 여닫으니
문앞 거리에 수레 소리 적다.
창이 밝도록 온돌이 따뜻하니
이불을 쓰고 자라처럼 머리를 오므린다.
채소 반찬에 밥 먹을 만하고
냉이국 끓이니 국맛도 좋다.
때로 마을에서 술을 얻어 마시니
취한 눈에 붉은 무늬 생긴다.
남들은 영화로운 것이 아니라고들 하지만
역시 나의 소박함을 기를 수 있다.
가시 사립문으로 돌아오니
편안하고 한가로워 절로 기쁨이 넘친다.
태평의 시대를 노래하며
산 언덕이 찢어질 듯 크게 소리를 지른다.

 문양공사우 (1980년대) 선생의 시(詩)에는 개인적 감상을 담은 작품이 돋보인다. 선생은 일찍이 부인을 잃고 두 자식을 연이어 잃은 슬픔을 당하기도 했다. 누구나 살다보면 부인과 자식을 여의지만 가정 에 대한 애정을 시어(詩語)로 추스린 선생의 타고난 성품을 보면 선생의 감성에 충분히 공 감하게 된다.
59세(1482)에 부인(순흥 안씨)의 죽음을 애도하며 규벽(규 벽, 잔 글자로 박아서 부피를 작게 한 경서, 또는 지난날 중국에서 제후가 천자를 뵐 때 지니던 홀)에다 지어 붙였다는 '오경가(五更歌)'를 보면 초경(初更, 하오 7시부터 아홉시까지의 사이)부터 오경(五更, 상오 3시부터 5시까지)까지 부인의 임종을 지켜보며 여명에서 오는 어둠을 근심으로 인해 어둡 다고 표현한 색채 실루엣(Silhouette)은 절묘하다고 이를 말한다.
'도자편(悼子篇)'은 자식을 잃은 어버이의 슬픔을 표현하였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일방적 사랑에서 재능을 보일 때마다 귀엽기만 했던 어린시절과 병을 앓고 괴로워하는 자식을 보면 서도 어쩔 수 없어 하던 어버이로서의 모습을 그린 전단을 읽고 난 뒤, 하늘을 찾을 수 밖 에 없는 부모로서의 곡진한 슬픔을 그린 후단에 접할쯤이면, 우리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함 께 슬픔에 빠져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선생은 문장뿐만 아니라 특히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 오쿠 라 문화재단(小倉文化財團)에 소장되어 있는 「독조도(獨釣圖)」가 선생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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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 신도비 전경


선생은 또 금양지방의 민담과 관직생활 중 들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촌담해이(村談解)』라는 소화집(笑話集)을 엮었다. 그밖에도 금양지방에 거주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작품들 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이 지방의 농요를 채집하여 한시로 개작한 '농구 14장(農謳十四章)' 을 살펴보면 '내용과 분위기에 맞지 않다.' 개작할 정도로 가요에 대한 선생의 문학적 관심 뿐 아니라 농민애를 엿볼 수 있다.


○묘와 신도비
-지정문화재 : 강희맹 묘 및 신도비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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