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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창제에 이바지한 시, 서, 화 삼절 명인 강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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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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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창제에 이바지한 시, 서, 화의 명인 강희안
○생몰년대: 1418~1464
○조선 초기의 문신ㆍ학자. 자는 경우(景遇), 호는 인재(仁齋),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가족관계: 지돈 령부사 강석덕(姜碩德)의 장남, 어머니는 청송 심씨로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 좌 찬성 강희맹(姜希孟)의 형, 세종의 이질.

○생애 


선생은 21세(143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년 뒤(1441)에 식년시 정과에 13등으로 급제 하여 한림에 제수된 뒤 주부ㆍ예조좌랑을 거쳐 26세에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正音) 28자에 대한 해석을 덧붙였으며, 27세에 돈령부 주부가 되었다. 이때 중국 음운학에 조예가 깊었던 성삼문ㆍ정인지ㆍ박팽년ㆍ신숙주ㆍ최항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해설서인 『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의 편찬과 집필에 참여했다. 이어 28세 되던 해(1445) 4월에 정인지ㆍ안지ㆍ권제 등으로 하여금 『용비어천가』를 찬진케 했으나, 그 내용이 만족 스럽지 못하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사업에 선생을 비롯하여 성삼문ㆍ신숙주ㆍ박팽년ㆍ 최항ㆍ이개 등과 함께 보완하여 2년 뒤에 간행하였다. 이해(1447)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이어 성삼문ㆍ이개ㆍ최항 등과 함께 『동국정운(東國正韻)』을 완성하였다.


33세에 부지돈령으로 있을 때 세종이 위독하자 미타관음(彌陀觀音) 등의 경문을 썼으며, 이듬해 8월에 사헌부 장령을 거쳐 지사간원사를 역임했다. 이어 37세에 집현전 직제학이 되어 학문연구에 전념하면서 화초재배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이듬해(1455) 원종공신 (原從功臣) 2등 녹훈되었다. 이 해 동활자인 올해자(乙亥字)를 주조할 때 자모의 글씨를 썼 다. 이 활자는 앞서 주조된 갑인자(甲寅字)보다 획이 곧고 바르며 옆이 넓은 게 특징이다. 39세 때인 세조 2년(1456)에 단종복위 모의에 가담했으나 성삼문의 변호와 특히 세조와는 이종사촌 사이인 관계로 화를 면했다.
그러나 그 뒤 대사헌 신석조(辛碩祖)와 좌사간 이종검(李宗儉)이 선생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임금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그 뒤(1460) 호조참의 겸 황해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45세에 인수부윤(仁壽府尹)으로서 예조참판 김계희 (金係熙)와 함께 사은부사가 되어 표ㆍ전(表箋)을 받들고 북경에 갔는데, 그 곳 사람들이 선 생의 문장과 서화를 크게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중추원부사로 있다가 인수부윤 재임시에 병을 얻어 10월 9일에 항년 47세에 사망했다. 임금이 관곽(棺 槨)을 부의로 내려주었다.선생은 누대에 걸친 문신 관료의 후손으로 태어나 선생 자신도 문인 기질의 사대부로서 학자인 동시에 시(詩)ㆍ글씨(書)ㆍ그림(畵)에 모두 뛰어난 ‘삼절(三絶)’의 예술가였다. 

학자로 서의 선생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훈민정음해례본』과 『동국정운』 및 『용비어천가』 의 보완, 주석에 참여했다. 학문으로서의 선생은 성리학ㆍ중국음운학ㆍ역사학 등에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생각되지만 왕명에 의해 공동 집필한 관계로 선생이 집필한 부분을 찾아낼 수 없음이 매우 안타깝다.


선생은 문신이자 학자이며 또한 서화가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원예서를 저술한 최초의 원예학자였다. 최초의 원예서는 곧 『청천양화소록(菁川養花小錄)』을 말하는데, 이 책은 선 생이 죽은 지 10년만인 성종 5년(1474)에 아우 강희맹이 자신의 할아버지ㆍ아버지ㆍ형(강 희안)의 문집을 엮은 『진산세고(晋山世稿)』 4권에 넣어 함양군수 김종직(金宗直)에 의해 간행되었다. 『양화소록』ㆍ『양화묘방』ㆍ『청천양화록』 등의 책은 모두 『양화소록』의 이명이다. 이 책의 내용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완상(玩賞)하여 온 꽃과 나무 몇십 종을 들어 그 재배법 및 나무의 품격과 그 의미, 상징성을 논하고 있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은 꽃에 인공을 가하여 빛깔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 고, 화훼 끝분에 괴석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수석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다. 다음으로 화분에 꽃나무 심기, 개화를 촉진하는 방법, 꽃꽂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선생은 이 책을 서술함이 있어 『제민요술(齊民要術)』ㆍ『죽보(竹譜)』 등 30여 종의 중국 문헌을 참고하였으나 단순한 문헌 인용뿐이 아니고 우리 나라 재배기술의 전문(傳聞)과 선생 자신 체험을 토대로 저술했기 때문에 이 책은 우리 나라 화훼원예학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양화소록』은 양화서(養花書)의 기본이 되는 책으로 『임원경제지』 등에 인용되었고, 특 히 일본에 건너가 에도시대(江戶時代)의 본초(本草) 학자들에게 널리 읽혔다는 기록으로 보 아 선생의 『양화소록』은 큰 업적이다.
선생은 두어 살 때부터 담장과 벽에 손 가는 대로 글씨 혹은 그림을 그렸는데 격식에 맞 지 않는 것이 없을 만큼 어려서부터 예능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선생의 서법은 중국 왕 희지의 진체(晋體)와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에 능하였다. 28세 때(1445) 황금 125냥으로 제작한 금인소신지보(金印昭信之寶)는 선생의 글씨이며, 세종이 명나라에서 보내온 체천목 민(體天牧民) 영창후사(永昌後嗣)의 8글자로 옥쇄를 만들고자 할 때 선생의 전서(篆書)여야 한다고 대신들이 추천했다. 세종의 장례 때 중국 사신이 와서 우리 나라 사람들의 글씨를 보고자 했을 때에도 선생이 천거될 만큼 당대 서예의 대가였다. 선생을 특히 전서ㆍ예서(隸 書)와 8분(八分)에도 모두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시(詩)는 위응물(韋應物)ㆍ유종원(柳宗元)과 같다는 평을 들었으나 자신의 글을 세상에 발 표하기를 꺼려 전하는 문집이 없다.
 선생이 양주누원(楊州樓院)에 올라가 “어딘들 뫼 있으 면 집을 삼지 못하리요. 푸른 산을 마주앉아 한 번 거처해 보노라. 십 년을 벼슬 하다 이 몸이 늙어가 고향에 돌아감을 백발 되기 기다리지 말라.”라는 시를 지었는데, 영천군(永川 君) 정(定)이 이를 보고 절하고 그 밑에 비평을 쓰기를 “서(徐 : 서거정)가 아니면 곧 이 (李 : 이승소)의 솜씨다.”라고 하였다. 뒤에 어떤 사람이 그 밑에 “이 시는 강산의 아휘가 있고 한 점도 티끌 낀 태도가 없으니 반드시 세속 선비의 결습(結習)에 구애된 자가 지은 바는 아닐 것이고, 또 천지가 넓으니 어찌 인재가 없을 것이랴. 하필 서ㆍ이를 칭송하였으 니 어찌 인재를 멸시함이 이다지 심한가.”라고 써서 선생의 문재를 높이 평가했다.

선생의 아우 강희맹은 형(희안)의 시사(詩思)와 화취(畵趣)를 왕유(王維)의 경지에 이르렀 다고 평했으며, 성현(成俔)은 산수와 인물을 칭찬했는데 특히 선생의 『여인도(麗人圖)』가 걸작이라고 했다. 김안노(金安老)는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서 “강희안은 시ㆍ서ㆍ화 를 당시 삼절이라 하였다. 묵화도 산수조경과 충조(蟲鳥)ㆍ초목ㆍ인물 등을 그린 것이 자못 소탈하면서도 저절로 생기가 있었다. 그 조화롭고 농욱한 때깔은 화원들의 색상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시옹의 연원은 화사(畵使)의 격 외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또 서거정(徐居正)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서 “강희안은 시ㆍ서ㆍ화 삼절로 한 세상에 뛰어났으나 시는 위응 물ㆍ유종원과 같았고, 그림은 유송년(劉松年)ㆍ곽희와 같고, 글씨는 조맹부ㆍ왕희지와 같았다. 
사람이 재주있고 덕이 있어 참으로 대인군자”라고 했다. 미술평론가 김윤수(金潤洙)는 “고도의 수양이 있는 선비가 아니고서는 낼 수 없고, 또 추가할 수 없는 완전함을 이루는 고매한 품격과 당ㆍ송ㆍ원의 고법을 융합한 이루 말할 수 없는 호단의 조화는 그 특유의 것 이다. 말하자면 필력이 호탕하면서도 일점 원화(院畵)의 누습이 보이지 않은 한편 서권기(書 券氣)가 충만한 점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서화 는 천한 기술이므로 후세에 유전되면 이름에 욕이 된다.”며 밖으로 드러내는 것을 꺼려해서 남은 작품이 많지 않다. 안견ㆍ최경과 함께 조선 전기의 3대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기록상에 전하는 선생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풍경화와 묵화를 즐겨 그렸고, 영모화 (翎毛畵)ㆍ산수화ㆍ인물화에도 두루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작품으로는 전술한 「여인도」 가 유명하고, 「청학동(靑鶴洞)」ㆍ「청천강(靑川江)」의 두 족자와 「경운도(耕雲圖)」는 모두 기보(奇寶)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37세 때(1454) 산천 형세를 잘 아는 예조참판 정척(鄭陟), 지도에 밝은 직전(直殿) 양성지(梁誠之)와 함께 수양대군이 팔도 및 서울의 지도 를 제작하는 데 참여했다. 그림은 전술한 강희맹ㆍ서거정ㆍ성현ㆍ김안로 등이 소견한 바를 서술한 것을 조사하면 수십 점에 이르나 현존하는 것은 「교두연수도(橋頭烟樹圖)」ㆍ「산 수인물도(山水人物圖)」ㆍ「고사관수도(古士觀水圖)」ㆍ「강호한거도(江湖閑居圖)」 등 8점 정도이며, 글씨는 「강지돈녕석덕묘표(姜知敦寧碩德墓表)」ㆍ「윤공간공묘비(尹恭簡公墓 碑)」가 있다.


선생은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ㆍ소박하고 물리에 통달하였고, 또 번거로운 싫 어하고 고요한 것을 사랑하여 젊어서부터 부귀영달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한때 의정부에서 검상(檢詳)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끝까지 사양하여 오해를 받은 바 있었다. 부인은 고성 이 씨와 언양 김씨로 슬하에 딸만 넷을 두어 후사가 없자 사후 12년 만인 성종 17년(1476)에 양자 문제를 조성에서 논의해 희맹의 2남 학손(鶴孫)을 양자로 입적케 하라는 결정이 내려 졌다.
사후 537년만인 2000년 10월에 경기도가 ‘이달의 인물’로 선정했고, 아울러 진주강씨 문양공파종중에 의해 한글창제비(글씨 : 한갑수)가 세워졌다.


○묘
본래 장단군 낙화창(落花 倉) 판원촌(板院村)에 있다가 1987년 5월 선생의 아우 강희맹의 묘가 있는 시흥시 하상동 산2(연꽃마을)로 이장되었다. 묘역에는 소양당(素養堂) 김수녕(金壽寧)이 선생의 행장을 엮은 묘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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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수도(山水圖                                  사인휘호(士人揮毫)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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