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학과 역학에 뛰어난 구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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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5:31본문
● 경학과 역학에 뛰어난 구종직
영정(소장처 : 충남 서천군 문산면 지원리 선생의 사당) | ○ 생몰년대: 1404~1477 ○ 조선 초기의 공신ㆍ문신. 자는 정보(正甫), 호는 백결재(白潔齋),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 가족관계: 아버지는 증좌찬성 구양선(丘揚善)이며, 어머니는 창원 공씨로 선공감정 공성길(孔成吉)의 딸. 선생은 형용이 뛰어나고 재질이 총명하여 5세에 글을 배워 32세에 진사시에 오르 고, 41세 되던 해에 식년시에 정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에 제수되었고, 이어 직강ㆍ봉사 시 직장을 거쳐 44세에 영동현감에 나아갔다가 내직(內職)으로 사간원좌헌납 겸 지제교에 재임 중 큰 옥사가 있었는데 선생의 변론으로 잘 처리되어 임금으로 부터 청송을 받았 다. 53세에 성균관 사예에 임명되었고, 이해 가을에 낙안군수로 나아가 선정을 하였고, 58세 에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성으로 입조(入朝)하였다가 이듬해 연안도호부사ㆍ고성군수를 역임한 뒤 60세 때(1463)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62세에 임금이 학문의 연구를 일으킬 때 선생이 성리학에 밝음을 알고 성균관직강 겸 종학박사에 제수했다. 이해 9월에 세자가 명륜당 유생에게 의리(義理)에 관한 의견 개진을 제출하라는 전지(傳旨)가 있자 선생이 명백 한 강론을 전달하므로 곧 성균관 대사성에 특진되었다. 이후 친강(親講) 때 마다 역리를 논 하는 영광을 입었다. |
63세 되던 해(1466) 2월에 공조참판, 6월에 수공조판, 8월에 등준시에 급제하고 자헌대부 에 올랐다. 이듬해 행호군으로서 새로이 제정한 형전(刑典)을 교정하고, 65세 때(1468) 행지 중추부사를 역임했다. 선생이 66세 때(1469) 성종이 즉위하자 행첨지중추부사 겸 지경연사 를 지냈고, 68세에 경연 때의 언사(言辭)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경연직을 박탈당하여 행상 호군에 임명되었다. 이듬해(1472)에 나이 70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어 날 것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벼슬이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과 경학이 밝았다.
향년 74 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부인 온양 정씨와의 사이에 5남을 두었다. 시호는 안장(安長)이다. 일화로서, 문과에 오른 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 때 하루는 숙직을 하다가 경회 루의 경치가 매우 좋다는 말을 듣고 평상복으로 경회루 연못가를 산책하였을 때 마침 세종 이 내시 몇 명을 거느리고 그곳에 나타나자 황급히 임금 앞에 엎드렸다. 이에 세종이 선생 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묻고는 "경전을
외울 줄 아느냐?"고 물었다. 선생이 『춘추』한 권을 줄줄 암송하자 세종이 크게 감탄하고 이튿날 선생을 교서관부교리에 임명, 9품직인 정자에서 하루아침에 종5품직인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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