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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평수문의 재상 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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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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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평수문의 재상 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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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소장처 : 조중구 구장)
○ 생몰년대 : 1376~1453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ㆍ신희옹(新稀翁), 본관은 진주(晋州) 이다.
○ 가족관계 : 부윤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 정우(鄭寓)의 딸. 부인은 성주 이씨로 개성윤(開城尹) 이존성(李存性)의 딸로 선생과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 거주 및 출생: 진주 이구 산(李丘山) 아래 여사촌(餘沙村, 현 진양군 단성면 남사리)에서 출생.
○ 시호 : 문효(文孝)
"학문에 힘쓰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이 문(文)이고, 자상하고 부모를 아끼는 것이 효(孝)이다" .
○ 편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진양연고 (晋陽聯藁)』
○ 저서 : 『경재집(敬齋集)』

○생애

정몽주의 문인. 선생은 21세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식년시에 병과에 4등으로 급제하여 봉 상시 녹사에 제수되었고, 이어 직예문춘추관 수찬관ㆍ집의ㆍ동부대언(同副代言) 등을 지냈 다. 이때 선생이 간관(諫官)으로서의 의연한 자세로 일을 처리하자 태종이 손수 손을 잡고 치하했다.

 
그 뒤 세종이 즉위하자 지신사(知申事)가 되어 조심스럽게 처사하여 신임받아 예조판서와 대사헌을 지냈다. 48세가 되던 해(1423)에는 대사헌으로 조계종 등 불교 7종파를 선(禪)ㆍ 교(敎)의 양종(兩宗)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는 국가로 환수하고자 하여 채택받았다. 2년 뒤(1425)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예조참판을 거쳐 평안도 관찰사 겸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파직되어 천안으로 귀양갔다.

 
이듬해에 풀려나와 54세에 병조참판에 임명되었고, 66세에 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시묘를 하였다. 68세에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로서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그 뒤 형조판서ㆍ좌참찬을 지내고, 의정부에 들어가서는 판이조판서로서 이조의 일을 맡아 보았다.

 
70세에 좌찬성이 되어 궤장(?杖)을 하사받았다. 곧 우의정ㆍ좌의정이 되었고, 74세에 영 의정에 올랐다. 2년 뒤(1451)에 문종이 대자암을 중수하려고 하자 이에 반대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2년 뒤(1453) 8월 15일에 향년 78세로 사망했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간 문안에 사알(私謁, 사사로운 일로 윗 사람을 뵘)을 들이지 않았으며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 (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단종 2년(1454)에 세자사부(世子師傅)의 옛 은혜로 문종(文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세조 9년(1463)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충효문(忠孝門)을 세웠다. 이어 세조 13 년(1467)에 영당(影堂)을 세웠는데, 그 뒤 선조 41년(1608)에 영당을 합천의 야로(冶爐)에 옮겨 세웠다. 광해군 7년(1615)에 타진당(妥眞堂)이 사액되었고 인조 2년(1624)에 합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이 건립되었다. 또 숙종 34년(1708)에 문의(文義)의 우록서원(友鹿書院) 이 건립되고, 숙종 44년(1718)에 진주의 종천서원(宗川書院)이 건립되었다. 그 뒤에도 정조 10년(1786)에 장연의 반곡서원(盤谷書院)이, 순종조에 무주의 백산서원(柏産書院)이 건립되었다. 


선생은 성품이 간결하였으며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일족과 인(仁)으로 화목하였으며 친 구를 버리지 않고 경조(慶弔)를 빠트리지 않았다. 

글읽기와 시읊기를 좋아하였으며 가산(家 産)에 힘쓰지 않고 성색(聲色)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집안에선 화목하고 관아에서의 일처리 에는 밝게 살피기에 힘썼으며 새로운 일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양친이 함께 연세가 팔십이었는데 마음으로 좋아하는 모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또한 구경당(具慶堂)을 지어 세시(歲時)와 복일(伏日) 납일(臘日)에는 반드시 잔치를 열어 장수를 빌었다. 이에 남 들이 모두 영화롭게 여겼으며 그 일을 노래지어 부르기에 이르렀다. 

부모가 별세하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사당에 고하였다. 또한 구경당은 부모가 거처하던 곳이므로 해마다 지붕을 수리하며 명칭을 고쳐 영모당(永慕堂)이라 하였다. 

이에 자질(子 姪)들이 기와로 고쳐 얹을 것을 청하니 하연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부모가 거처하시던 곳을 어찌 바꿀 수 있겠느냐? 또한 나의 후세로 하여금 선대의 검소함을 법삼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묘당(廟堂)에 있은지 전후 이십년 동안 사대부를 예의로 접하였으며, 집으로 찾아오 는 개인적인 방문은 받지 않았다. 또한 시종토록 조심스러웠으며 법 집행에 흔들리지 않았 으니 승평한 시대의 수문(守文)재상이라 할 만하다.

 

○묘 : 지정문화재 : 하연 선생묘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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