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가 되던 해(1399) 좌부승지를 역임하고, 이듬해 초에 박포(朴苞)가 방원과 반목중이 던 방간(芳幹)을 충동하여 거병하자 군사를 동원, 제거하여 곧 좌군총제(佐軍摠制) 되었고, 28세 때(1400) 태종이 즉위하자좌명공신 1등이 되었다. 30세 때(1402) 새로 설치한 내갑 사(內甲士)의 좌번(佐番) 책임자가 되었고, 지승추부사(知承樞府事)가 되었다. 이 해 말 안변 부사 조사의(趙思義)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도진무로서 좌도도통사와 함께 출정하여 진압하 였다. 이어 지의정부사ㆍ참찬의정부사를 거쳐 33세에 지공거(知貢擧)에 임명되었고, 34세에 겸중군총제ㆍ겸판의용순금사사를 역임했다. 35세 때인 태종 7년(1407)에 겸충좌시위사상호군 등을 지내고, 이듬해 십사상호군(十司上 護軍)이 폐지되자 겸중군도총제(兼中軍都摠制)에 제수되었고, 37세에 동북면절제사를 역임했다. 그 뒤 참찬의정부사ㆍ겸지의흥부사(兼知義興府事)를 역임하고, 40세에 종1품 승정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병조판서, 42세에 의정부 찬성사가 되었고, 이어 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를 거쳐 좌참찬을 역임하고 좌찬성에 이르렀다. 이해(1414) 지 춘추관사로서 영춘추관사 하륜(河崙) 등과 함께 『고려사』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고쳐 바로잡도록 명을 받았다. 이듬해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평소 태종의 처남이었던 민무구 형제들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윤저 등과 함께 파당을 지어 비방했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결국 관 작을 삭탈당하여, 45세에 경상도 함양에 유배되었다. 세종조에 『용비어천가』를 편찬할 때 도승지 김돈(金墩)이 선왕 때의 일을 상세히 알고 있다고 천거해 서울에 불려와 편찬을 도 왔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 - 위치: 시흥시 산현동 산 71 금이∼화정 간 도로변, - 후대에 세운 묘비의 비문은 강희맹(姜希孟)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