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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왕씨의 중시조 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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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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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왕씨의 중시조 왕미

 ○ 생몰년대 : 1365~?
 
e328cd4b776da5aa4fdc17f2afe9713c_1602657213_28.jpg○ 묘소 (멀리보이는 산이 군자봉)

 ○ 생애
 
왕씨는 문헌에 15본(本)으로 나타나 있으나 고려조의 왕족인 개성 왕씨와 강릉 왕씨, 제주 왕씨로 크게 나눈다. 개성 왕씨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강릉 왕씨는 왕건의 아들 왕유(王裕)가 시조이다. 그리고 제주 왕씨의 시조는 왕유(王儒)인데, 그는 본래 박씨였으므로 개성 왕씨와는 동성이족(同姓異族)이다. 왕건이 세운 고려는 건국 4백 75년만인 1392년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혁명세력에 의해 멸망되었는데, 이때부터 왕씨들에게는 대대적인 수난이 계속되었다.

 

이성계는 처음에는 고려조의 왕씨의 후예에 대해 구세력의 유화(宥和)하는 뜻에서도 비교적 온건책을 썼 으나 태조 3년(1394)에 이르러서 개국공신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이들 왕씨 일족을 몰살시켰는가 하면, 육지에 숨어있는 왕씨들을 색출하여 모조리 바다에 던져 죽임으로써 고려조의 왕손은 멸족되다시피 되었다. 당시 왕건의 12세손으로 벼슬이 교서감(校書監)에 이르고, 제용감 정(濟用監 正)에 추증된 왕미(王?, 1365~?) 선생은 왕씨 성 가진 사람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자 어머니의 성인 윤씨로 바꾸고, 동생 왕흥(王興)과 함께 중원(현 충주)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이때 이웃 아이들과 놀다가 성씨가 왕씨로 발각되어 곧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마침 고려 태조(왕건)가 꿈에 나타나 왕씨를 함부로 살해한다고 호통치므로 태종이 크게 뉘우쳐 선생의 형제가 풀려났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려 태조의 후손들은 화(禍)를 면하게 되었다. 더욱이 고려 태조 이후 12일대손 까지의 유적이 전무한 상태로서 후손 또한 전무한 상태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고려 태조의 후손(개성 왕씨)의 (남북한)대부분 선생의 후손이므로 개성 왕씨의 중시조라 할 것이다. 개성왕씨는 고려때에는 개성에서 살다가 고려왕조가 망하자 대체로 12세 왕미의 대 이래로 시흥에 살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1930년 당시 개성왕씨는 경기도 시흥군을 비롯하여 이천군 율면, 연천군 미산면, 경남 의령군 의령면, 전북 익산 여산면 등지에 세거하였다.




○묘


- 위치: 시흥시 군자동 산 114 구지정 뒷산

- 선생의 묘는 조선 고종말까지 알려지지 않다가 묘아래에 살던 어느 분이 석물과 봉분을 없애고 남몰래 장사했던 것을 인척이 지석을 찾아 개성 왕씨 문중에 알려주어 비로서 묘를 찾게 되었다고 한다.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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