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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을사조약 반대한 소두(疏頭) 조병세(趙秉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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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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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을사조약 반대한 소두(疏頭) 조병세(趙秉世)

○생몰년도 : 1827~1905
○조선 말기의 문신ㆍ순국열사.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본관은 양주(楊州)이다.
○가족관계 : 홍천현감 조유순(趙有淳)의 장남, 어머니는 대구 서씨. 부인은 광산 김씨로 슬하에 2남 을 두었다.
○시호: 충정(忠正).
○출생 및 거주: 서울 회현동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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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con_arrow03.gif 조병세씨 일기(소장처:규장각)
 


○생애  


선생의 집안은 경종 때(1721~1722) 신임사화를 당한 노론 4대신 중의 한 사람인 조태채(趙 泰采)의 6세손이다.


  선생은 음직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가 33세에 증광시 병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사관(사 관)에 제수되었고, 38세에 실록청도청낭관으로 『철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0년 뒤인 48세에 함경도 암행어사를 거쳐 51세에 대사헌에 승진되었다. 그 뒤 의주부윤ㆍ대사헌에 임명되었고, 61세에 공조판서, 이듬해에 예조판서ㆍ이조판서를 지내고, 2년뒤에 한성부 판윤 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고, 67세에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68세(1894)에 동학농민운동ㆍ청일전쟁ㆍ갑오개혁 등 커다란 사건이 연이 어 일어나고 일제의 침략이 가중되어 세상이 어수선하게 되자 정계를 떠나 선향인 경기도 가평(加平)에 내려가 은거하였다. 뒤에 다시 중추원 의장과 의정부 의장을 지내고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으나 주로 가평에 은거하였다.


  70세 때(1896) 폐정개혁을 위해 시무(時務) 19조를 올렸으며, 72세에 재상에 임명되었으 나 곧 사퇴하였다. 그 후 2년 뒤(1900)에 다시 입궐하여 국정의 개혁을 건의하였다. 79세 때인 11월 17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79세의 노 구를 이끌고 가평으로부터 서울에 올라와 을사5적(乙巳五賊)의 처형을 주창하려 했으나 일 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서 민족의 울분을 터뜨리고 전국 13도의 유생(儒生)들이 5적의 처형과 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중에 11월 19일 특진관 이근명(李根命), 의정부 참찬 이상설(李相卨)을 비롯한 조관(朝官) 30여명이 개별 상 소하여 5적의 처형과 을사조약의 폐기를 요청하였으나 국왕의 확고한 대답이 내려지지 않 자 11월 26일 참정(參政) 심상훈(沈相薰), 시종무관장(侍

從武官長) 민영환(閔泳煥), 이근명, 김가진(金嘉鎭) 등 백관을 거느리고 입궐하여 정청(庭請)의 소두(疏頭)로서 을사조약의 무효, 을사5적신의 처형, 새로 충량한 인재를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 등을 연소(聯疏)하다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고 표훈원(表勳 院)에 연금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그러나 다시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석고대죄하며 을사 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또다시 일본 헌병에 강제연행되자 민영환이 대신 소두가 되었으나 민영환도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하고 11월 29 일 자결하였다.


  강제연행된 뒤 곧 가평 향제에 추방되었으나 11월 30일 다시 상경하였다. 12월 1일 다시 표훈원으로 가서 비지(批旨)를 받은 다음 다시 상경하였다. 12월 1일 다시 표훈원으로 가서 비지를 받은 다음 다시 상소코저 했으나 일본 헌병들이 달려와 그를 억지로 교자(轎子)에 태웠다. 국난을 바로잡을 수 없음을 간파한 선생은 교자 속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아편을 꺼내어 마셨는데, 조금 후 족질(族侄) 조민희의 집에 들어갔으나 이미 선생의 용태는 위독 한 상태였다. 당황한 일본 헌병들을 의사를 데려와 진료시켜야 한다고 수선을 피우자 이떄 선생의 사위 이용직(李容稙)이 "이놈들아, 우리 대한의 대신이 나라를 위하여 자결코자 하 는데 너희 무리들이 무슨 일로 간예(干預)하려 하며, 또 돌아가는 분을 욕보이는가!"라고 꾸 짖자 모두 다 도망쳐 버렸다. 선생이 순국하기 전에 미국ㆍ영국ㆍ독일ㆍ불란서ㆍ이태리 공 사(公使)에게 보내는 글(遺書)에서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웃 나라와의 우의를 멀리 생각하고 약소국가를 동정하시어 공동회의로 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병세는 죽어 서도 결초보은하겠습니다."라고 호소했고, 또 하야시 일본공사에게는 "17일 밤에

 

군대를 동원하여 삼엄하게 궁궐을 포위하고 참정(參政 : 한규설)을 구속하고 외상(外相)을 협박하고 식례(式例)도 갖추지 않고 억지로 조인하여 외교권을 강탈하였다. 정의와 공리로써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하였다.


  이와 같이 국가의 위난을 건지고자 하는 지극한 선생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미 국력이 쇠잔하여 외국인들도 아무 도움을 주지 못했다. 절치 분개하며 아편의 통증으로 괴로워하다 가 12월 1일 오후 6시경 향년 79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선생의 부음을 들은 국민들이 조 문하여 곡하는 이가 많았으며, 외국 인사들도 조문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고종황제는 산 생을 대훈위(大勳位)에 추서하고 금척대수장(金尺大綏章)을 하사하였다. 장의는 동년 12월 8일 종로 네거리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는데, 사민조회소원(士民朝會所員) 및 여러 유지사 들이 분향하고 조사를 읽었는데 일본의 경무고문은 교통 및 치안 방해라는 구실로 이를 금 지하자 부득이 화개동 조민희(趙民熙 ; 조카) 댁으로 식장을 옮겼다. 이때 회장자(會葬者)가 1천여 명이었고, 출관(出棺)을 기다리는 시민들은 청ㆍ홍ㆍ백의 만장과 크고 작은 등을 들 고 표훈원에서 조민희 댁까지를 메웠다.


 1962년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고, 국가보훈처에 의하여 1995년 12월에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지정문화재 : 조병세 묘

• 출처 : 시흥시, 『시흥의 인물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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