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민현 선생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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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작성일20-10-14 10:23본문
● 윤민헌 선생묘
윤민헌 선생 묘
-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16호
- 지정일자: 2002년 3월 15일
- 소재지: 산현동 산53
- 시대: 묘-인조6년(1628), 묘갈-숙종 35년(1709)
- 소유자: 파평윤씨 영평위파 종회
- 관리자: 파평윤씨 영평위파 종회
윤민헌(尹民獻, 1562∼1628)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이다. 아버지는 호조좌랑 엄(儼)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주(金澍)의 딸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조 21년(158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광해군 1년(160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외교문서 담당 관청)에 들어갔다. 그 뒤 형조좌랑·전라도도사·형조정랑 등을 거쳤으며, 광해군 때 붕당간의 대립으로 정국이 어지럽자 1618년 대동찰방을 마지막으로 안산(현재의 시흥)으로 물러나 살았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임명되고, 장령·내섬시정을 거쳐 평안도절도사로 나갔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공주로 왕을 호종한 공으로 통정대부(정3품)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공조참의에 이르렀으나 병으로 사직하여, 안산으로 돌아와 타계하였다. 1646년(인조 24)에 대제학(大提學),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그는 자성(資性)이 순정(純正)하고, 일을 당하면 스스로 지킬 줄 알았으며,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에 능하였다고 한다. 특히 조맹부(趙孟?)를 사숙(私淑)하여 해서를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묘소는 부인 연안 김씨와 합장으로, 인조 6년(1628)에 조성되었는데,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복호혈(伏虎穴)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묘갈은 숙종 35년(1709)에 세운 것으로, 형태는 당시 유행하던 방부개석의 양식인데, 기단석 위에 갈색의 대리석 비신(碑身)으로 다듬었다. 규모는 2.34m×97cm×32cm이다. 글씨는 선생의 손자인 평안도 관찰사 윤지인(尹趾仁, 1656~1718)이 썼고, 함흥부윤 윤덕준(尹德駿, 1658~1717)이 전(篆)을 올려 비신의 앞면과 뒷면에 음각하였다. 이 묘갈은 시흥에서 가장 클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가 좋고 양식이 독특하여 조선 중기의 묘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시내버스
11-2ㆍ32_물왕주유소 하차, 안산방향 약 1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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